배급·제작·투자 전반 남성비율 월등
“작업하기 불편” 女스태프 참여 꺼려
경력 부족·기회 박탈 ‘악순환’ 반복
감독·조감독 직급 여성영화인 42%
“제작비 50억 이상 작품 경험 없어”
연수입 2443만원… 전체평균 하회
지난해 제작비 30억원 이상 개봉영화의 감독 중 여성은 1명에 불과하다. 남성 감독이 36명이나 되는 것과 대비된다. 촬영감독은 아예 한 명도 없다. 전국 연극영화과 졸업생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지만, 대형 상업영화 현장과 감독직급으로 올라갈수록 여성인력은 뭉텅이로 사라진다.
이는 영화 제작현장의 공고한 남성 네트워크, 여성이 월등하지 않은 한 남성 스태프를 선호하는 풍토, 큰 영화일수록 여성에게 맡기기 불안해하는 선입견, 임신·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성희롱 피해 등이 복합해서 작용한 결과로 조사됐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여성 영화인 근로환경 및 경력개발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여성들이 감독급 영화인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작성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8∼10월 연출, 프로듀서(PD), 촬영, 미술 분야별로 감독·조감독 직급 여성영화인 36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의 41.6%(15명)는 (조)감독 직급이 된 후 한 번도 제작비 50억원 이상 영화에 참여하지 못했다. 1개 이상∼3개 미만은 22.2%(8명), 3개 이상 5개 미만은 19.4%(7명)였다. 여성영화인이 대형 상업영화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실태를 보여준다.
이들이 최근 1년(2022년 8월∼2023년 7월) 동안 영화로 벌어들인 수입은 평균 2443만원에 그쳤다. 2022년 전체 영화스태프의 연수입인 3020만원보다 낮은 액수다. 영화만으로 기회·소득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이들은 시리즈물·광고 제작, 강의·심사 등 영화 외 일(3392만원)을 따로 했다. 이들의 총 경력은 평균 18.1년이다.
조사 대상 영화인들은 여성이 감독직급으로 올라가기 힘든 이유로 ‘남성 네트워크’를 들었다.
한 여성 프로듀서는 “(남성 영화인들이) 사람을 뽑을 때 같이 일하고 대화하기 편한 사람 위주로 구하다 보니 여자 스태프들을 불편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여성 프로듀서 역시 “남자 감독님들이 남자 PD와 일하는 걸 더 선호한다고 느꼈다”며 “밤늦게까지 같이 있어야 되고 이런저런 얘기도 해야 되니까”라고 전했다.
직접 투자받아 영화를 제작해본 여성 프로듀서는 “배급사, 제작사, 투자사 대부분이 남성 성비가 월등히 높고 이들의 네트워킹이 상당히 공고하다”며 “제작직군의 여성 선배들은 연차가 쌓일수록 더 높은 직군에 가는 게 아니라 더 열악한 조건에서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다른 여성 프로듀서는 “남성들은 영화 제작현장에서 일해 본 경력이 좀 적더라도 불러주니까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커간다”며 “남성들은 선배들이 끌어주면서 현장 프로듀서가 되는 케이스가 많은데 여성들은 연결해 주고 끌어주는 선배가 굉장히 약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성 프로듀서는 “남성들 사이에 여성이 한두 명 끼면 물을 흐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며 “팀의 리더가 ‘우리 팀은 여자 안 받아’ 이런 얘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밝혔다.
여성에게 큰 작품을 해볼 기회를 주지 않으니 경험을 쌓지 못하고 이는 다시 ‘큰일을 맡기기 불안하다’는 선입견을 만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한 여성 프로듀서는 “투자사의 여성 팀장·본부장들조차 고액 상업영화에서는 여성보다 남성 PD를 선호하기도 한다”며 “‘여성에게 맡기면 뭔가 불안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 작업 현장에서는 성별 고정관념이 작동한다. 프로듀서의 경우 여성은 으레 회계 처리, 남성은 현장 지휘 식으로 역할을 정하니 진급할 때 여성이 불리하곤 했다. 한 프로듀서는 “남자들은 몸으로 뛰고 현장을 지휘하는 등 사람을 만나서 진행하는 일들을 많이 하니까 진급도 많이 하고, 하는 일이 더 크고 액티브하게 보인다”고 밝혔다.
촬영·조명 등 기술직군에서는 신체 조건의 차이에 따른 선입견을 감수해야 한다. 기술직군의 감독급 여성들은 “20㎏쯤 되는 장비를 다 들고 다니고 (남성보다) 1.5배 이상 노력해야 감독이 되는 것 같다” “‘똑같으면 힘센 남자를 쓰지 널 쓰겠냐? 네가 뛰어나게 더 잘하는 게 있으면 너를 쓰겠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기술직군은 도제식 문화다 보니 “여자 가르쳐봤자 어차피 시집이나 갈 텐데” “여자 촬영팀 정말 싫어하는데” 식의 차별적 말들에도 시달린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촬영 인력을 구하는 글 10개 중 9개는 ‘팀 사정상 여자분은 안 구합니다. 여자분이 계셔서 여자분 안 구합니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고 한다.
여성 영화인에게 출산·육아는 큰 부담이다. 작품을 하나씩 하면서 경력과 인맥을 쌓고 이를 기반으로 다음 일을 잡는 시장에서 임신·출산으로 인한 공백은 경력 단절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성희롱·성폭력도 여성 영화인이 경력 초기에 일터를 떠나게 만드는 주 요인이다. 한 프로듀서는 스태프 시절 결재받으러 가면 감독이 속옷 차림으로 있거나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내 방으로 와’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보고서는 “미술직군 여성들은 감독급 이하일 때 성희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감독급 이상이 되면 팀원들의 성희롱을 해결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