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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전두환정부의 권위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85년 12월30일 서울형사지방법원(현 서울중앙지법)의 한 법정. 반정부 시위에 가담한 어느 20세 운동권 대학생의 1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지방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의 명문대 의대에 다니다가 제적을 당했다는 피고인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정부의 농업정책을 비판하는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법정에 섰다. 앞선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요즘 같으면 상상조차 힘든 무거운 형량이나 당시만 해도 웬만해선 정부 비난이 허용되지 않는 엄혹한 시기였다.

대법원 청사에 세워진 정의의 여신상. 오른손에 저울, 왼손에 법전을 각각 들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담당 재판장은 판결 주문 낭독에 앞서 이례적으로 이 사건 심리에 임한 그의 소회를 밝혔다. 그는 피고인이 명문대 의대생이란 점을 언급하고선 “대학에 들어간 뒤 스스로 학업을 포기하고 진로 설정을 운동권으로 돌린 듯한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 이어 “피고인이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뜻을 법정에서라도 보였더라면 판사로서 도와줄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공부를 그만두고 계속 투쟁하겠다’는 의사를 이 법정에서 분명히 밝혔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피고인에게 검찰 구형량보다 훨씬 낮은 징역 1년을 선고한 재판장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실형을 선고하지만 피고인은 앞으로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행동의 내용과 방법에 대해 숙고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확신하는 것인지 피고인은 듣는 내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시절 법원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반정부 시위나 파업에 가담한 대학생, 노동자 등을 상대로 청구된 구속영장에 퇴짜를 놓았다는 이유로 수도권에 근무하던 판사가 하루아침에 격오지 법원으로 전보 발령을 받을 지경이었다. 일선 법관들은 이를 ‘유배’라고 부르며 자조했다. 의대 제적생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 재판장도 정부나 법원 윗선에서 보기에는 ‘삐딱한’ 판사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1980년대 중반 담당한 각종 시국사건에서 피의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거나 피고인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공안부 검사들 사이에 한때 ‘경계 대상’으로 꼽힌 적도 있다.

서울중앙지법 청사 전경. SNS 캡처

이 법관은 송창영(사법연수원 6기) 변호사다. 민주화 이후인 1989년 서울고법 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고 수십년간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가 지난 21일 84세를 일기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부고 기사는 고인에 대해 “1985∼1986년 민주화운동과 시위가 활발할 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기소된 고려대 전 학생회장 등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며 “당시 민주화운동 학생들에게 선고유예 판결은 이례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사법부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기에 형사사건 전담 판사로서 얼마나 고뇌가 컸을지 짐작이 간다. 고인한테 재판을 받고 인생 항로가 바뀐 이도 여럿 있을 듯하니 새삼 법관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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