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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멈춰있던 제민천의 시간을 흐르게 했나” 권오상 퍼즐랩 대표 [강은선의 청.바.지(청년 BY 지역)-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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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7-15 07:59:16 수정 : 2024-07-15 15:5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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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와 지역, 사회에 가치를 불어넣는 청년들이 있다. 동네 골목 살리기, 상권 활성화, 도시 재생…. 가치를 공유하는 청년들의 문화가 지역을 변화시키고 있다. 모이니 삶이됐고, 자생했고, 지역에 가치와 정체성이 생겨났다. 지역에 삶의 뿌리를 내린 청년들이 꿈꾸는 세상은 어떨까. 주말, ‘청.바.지(청년 BY 지역)’에서 지역 청년들이 바꾸고자 하는 동네, 지역, 사회이야기를 듣는다. <편집자주>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필요한 게 다 있네요?”

 

최근 충남 공주 제민천을 찾는 이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하나같이 하는 소리이다. 있는 게 많진 않지만, 없는 건 없다. 머물다 지내다보면 동네 안을 떠날 필요가 없다.

 

제민천은 공주 금학동에서 시내까지 4.2㎞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강 지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마을스테이 안내소 ‘크림’ 앞에 선 권오상 퍼즐랩 대표. 강은선 기자

제민천 서쪽을 슬슬 걷다보면 길 끝엔 공주사대부고가, 그 앞엔 충청감영(현 충남도청)터가 있다. 제민천 하면 떠오르는 ‘포인트’이다. 발길은 익숙한 곳으로 무작정 향한다. 헌데 눈길은 발길의 속도에 맞추지 못한다. 제민천 거리에, 골목길에, 이렇게 카페가 많았나. 책방과 게스트하우스는 또 언제 생겼지? ‘업스테어스’라는 곳은 무얼 하는 공간인가. 골목길 곳곳을 걷다보면 자연스레 발길의 속도는 준다. 

 

제민천 마을을 돌다보면 멈춤이 없다. 이곳은 어느 순간 점과 점이 연결돼 선이 돼있었다. 멈춰졌던 제민천의 시간은 흐르고 공간은 열렸다. 문화가 생겼다. 시선은 사회적기업인 ‘퍼즐랩’으로 향한다. 

 

◆전국 청년들의 창업산실 ‘제민천’

 

제민천에 둥지를 튼 ‘퍼즐랩’은 제민천 주변을 선으로 잇고 숨을 불어넣었다. 

 

권오상(48) 퍼즐랩 대표는 6년 전 공주에 여행온 첫날, 이주를 결심했다.

 

경기관광공사에서 관광자원 발굴과 관광코스 기획 업무를 맡아 15년을 일했다. 한마디로 관광업에 잔뼈가 굵은 그다. 아내의 고향인 공주를 찾은 그의 눈에 제민천 인근의 50년 넘은 한옥이 들어왔다. 2018년 제민천 서쪽 너머에 한옥 게스트하우스인 ‘봉황재’가 들어서게 된 이유이다. 이듬해 ‘퍼즐랩’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마을코워킹스페이스 업스테어스 모습. 강은선 기자

권 대표는 퍼즐랩을 ‘마을 경험 설계회사’라고 소개한다. 

 

“제민천을 찾는 건 여행일수도, 잠시 머무름일수도, 정착일 수도 있어요. 그들에게 열린 커뮤니티와 다양한 지역 탐구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주민과 방문객, 주민과 청년 간의 연결을 만들고 지역 탐구와 이주를 돕는거죠.”

그가 구상한 건 ‘마을 스테이’이다. 퍼즐랩이라는 회사 이름이 마을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퍼즐을 맞춘다는 뜻인 것처럼 동네에 먹을거리와 즐길거리, 볼거리를 느슨하게 엮어 마을 곳곳에 펼쳐놨다. 한 건물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수직호텔’이 마을 이곳저곳에 기능을 분산시킨 ‘수평호텔’을 떠올릴 수 있다.

 

퍼즐랩은 제민천 서쪽에 한옥 게스트하우스인 봉황재, 카페 체스넛프렌즈, 마을스테이 안내소 크림, 셰어하우스 버드나무빌, 업스테어스 코워킹스페이스를 운영한다. 제민천 동쪽엔 노는 사람이 모이는 곳인 노인회관, 커뮤니티호텔 슬로크루즈를 조성해 끊임없이 사람을 불러 모은다. 

 

봉황재는 1960년대 한옥의 외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객실은 리모델링했다. 마을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다.

 

노인회관은 노는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로 6개의 청년창업 브랜드가 입점해있다. 1층엔 한식당, 커프브루잉바, 2층은 일러스트·빈티지 의류 등 식사부터 쇼핑까지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놀이터이자 백화점이다. 업스테어스는 마을 코워킹스페이스로 지역주민과 방문객이 함께 모여 일하고 교류하는 공간이자 워케이션 방문자들의 업무공간이다. 커뮤니티호텔 슬로크루즈는 마을의 항해가 시작되는 곳이자, 여행자와 지역의 느슨한 연결이 이뤄지는 곳이다. 제민천뷰는 덤이다. 

 

마을스테이 안내소 ‘크림’. 이곳엔 숨겨진 비밀장소가 있다. 강은선 기자

‘크림’은 이들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곳이다. 호텔 프런트와 로비 역할을 하는 곳으로 방문객과 지역의 연결이 이뤄진다. 이곳은 특히 숨겨진 비밀장소가 있다. 궁금하다면 직원에게 물어보자. 

 

권 대표는 “이들 공간을 하나로 묶으면 수직호텔의 기능을 한다”며 “수직호텔은 엘리베이터로 이동하지만 수평호텔은 골목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제민천 마을은 이런 가상호텔을 운영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압축적이고 동선이 짧다. 길을 건너지 않아도 된다”며 “제민천을 따라 선형으로 이동하면 기능이 된다”고 덧붙였다. 

 

◆맛보고·즐기고·머무르고…그리고 살다

 

과일이나 빵 하나를 사더라도 맛을 본다. 경험을 하면 선택은 결정으로 이어진다. 사람이 사는 일에서 무작정 마을만 둘러보고는 살 수는 없는 법. 권 대표가 지역 발견과 실험 플랫폼인 ‘자유도’를 운영하는 이유이다. 수학 용어인 ‘자유도(degrees of freedom)’는 주어진 조건하에서 통계적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될 수 있는 요소의 수를 뜻한다. 실험은 실패가 아니라는 그의 철학과 맞닿아있다. 

 

한달살이 등 지역에서 일과 삶을 체험해보고 공동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그는 제공하고 있다. 

 

권 대표는 “마을스테이는 물리적 공간이나 주민들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호텔, 리조트 등 레이러를 하나씩 씌운 것”이라면서 “반면 자유도는 이주정착을 돕는 플랫폼으로 청년이나 중장년이나 지역사회와 교류하고 배우는 캠프”라고 설명했다.

 

마을코워킹스페이스 업스테어스 모습. 과거 제민천 부흥의 역사를 함께했던 호서극장 등을 그린 청년 작가의 작품이 걸려있다. 강은선 기자

2021년 한 해동안만 공주 청년마을 자유도를 거친 청년은 140명이 넘는다. 이 중 20여명이 공주에 남았다. 제민천에 제각각의 개성을 담은 빵집, 술집, 카페가 생기고 활력이 채워지는 배경이다. 

 

외지인이 제민천을 찾았을 때 마을 큐레이터는 또래 지역 주민이다. 6년이 넘는 시간동안 권 대표는 청년부터 중장년으로 구성된 지역주민 강사 풀을 40여명 구축했다. 

 

그는 제민천의 변화는 도시재생과는 다르다고 했다. 도시재생이 보통 관 주도로 위에서 아래로 추진되는 반면 제민천의 달라진 풍경은 지역 주민과의 협업으로 자생을 시작해서다. 

 

권 대표는 “마을 문화가 달라졌다. 기존 원주민들과 외부인에서 공주 주민이 된 이들의 융합이 시너지를 내고 있다”면서도 “마을 주민들이 똘똘 뭉치는 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저 지나가면서 툭 한 마디 건네고, 옥수수나 수박을 무심히 주기도 하고, 집에 없으면 문고리에 걸어두고 포틀럭파티도 하면서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다”며 “마을 주민들은 서로에게 안전망이 된다. 귀농귀촌과 다른 매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민천이 외부인들에 열린 모델이지만 이곳 역시 주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다. 퍼즐랩은 마을과 주민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와 속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권 대표는 “여행객의 발길이 닿는 곳이지만 주민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라는 게 중요한 가치”라며 “최근 서울 북촌에 관광객 방문 시간을 제한하며 주민 생활을 보호하는데 그런 문제가 도래할 때가 되면 퍼즐랩이 그런 부분을 조정하는 기능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권오상 퍼즐랩 대표가 마을스테이 안내소 크림 한 켠에 있는 ‘제민천 걷기여행지도’ 앞에서 웃고 있다. 강은선 기자

제민천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도중 만나는 동네 주민분들과 권 대표의 대화는 이웃들의 그것이었다. 한 어르신은 분재를 보고가라고 권 대표의 소매를 이끈다. 자유도를 통해 공주에 정착한 청년은 고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한 카페의 사장은 권 대표에게 줄 복숭아를 수확해놨다고 했다. 

 

마을의 설계자인가 싶었는데, 어디서나 누구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홍반장’이었다. 

 

권 대표는 지난 5년간 제민천 마을스테이의 몸집을 제법 부풀렸다. 마을투어를 오는 이들을 하루에 40명을 품을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와 슬로크루즈가 있고, 멀지 않은 골목에 ‘타운형 상권’이 형성됐다. 

 

그는 “퍼즐랩이 기획한 공간과 유·무형의 프로젝트로 실제로 이주하고 정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제민천이라는 공간 성격이 널리 알려지면서 하숙마을 등 빈자리들이 자연스럽게 채워지더라”라며 “청년들은 공주에 정착한 후 마을에서 함께 성장하고 우리의 상상이나 망상을 일상으로 만들어가는 일을 펼친다”고 했다. 

 

권 대표는 동네마다 레퍼런스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걸 꿈꾼다. 그의 시선은 충남 공주에만 머물러있지도 않다.

 

“한 번 우리 마을로 들어왔다고 해서 마을 주민이 되라는 법은 없어요. 우리는 그저 자신의 배를 찾고 물의 흐름을 따라 먼 바다로 자신의 항로를 만드는 일을 경험하게 해줄 뿐입니다. 어떤 항구에서 어떤 배를 택할 지는 선택자들의 몫이죠.”


공주=글·사진 강은선 기자 groov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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