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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 투하와 日의 항복… 역사 바꾼 세 남자의 결단

입력 : 2024-08-10 06:00:00 수정 : 2024-08-08 22: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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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길어지는 전쟁에도 항복의사 없어
연합군, 압도적인 무력으로 종전 판단
엄격·냉정한 美 전쟁부 장관 스팀슨
태평양 전략폭력 사령부 수장 스파츠
항복 종용 日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7만명 즉사 인류 첫 원폭 투하 대해부

항복의 길/ 에번 토머스/ 조행복 옮김/ 까치/ 2만2000원

 

많은 전함들이 바다 곳곳에서 침몰했고, 도시들은 폭격으로 불탔으며, 많은 일본인들이 굶어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일제의 패배는 객관적으로 자명해 보였다. 그런데도 동아시아 및 태평양 전선에 배치된 500만명의 일본군과 군부 지도자들은 스스로 항복할 의사나 의지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항복이라거나 패배라는 표현 자체를 금기시했고, 마치 집단 자살을 각오한 듯 야수 같은 항전의 의지만 강화시켰다.

연합군은 어마어마한 대군을 집결시켜 일본 본토 상륙을 준비했지만, 예상된 사상자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조차 부하들에게 숫자를 조작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합동참모본부는 연합군이 독일군을 무찌르려면 반년, 일본군을 쓰러뜨리려면 1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전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한 것이 과연 옳았는가를 두고 역사학계의 논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세 명의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핵폭탄 투하와 항복 과정을 추적한 책이 나왔다. 사진은 원폭 직후 나가사키. 까치 출판사 제공

심지어 미군은 공군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작은 이오시마 섬조차, 5주 동안 해병대원 7000여명이 사망한 끝에야 점령할 수 있었다. 일본군 역시 2만명이 희생됐지만. 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된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해선 엄청난 희생이 불가피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어마어마한 인명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미군에게 압도적인 무력인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어찌 보면 정해진 결론이었다. 1945년 3월, 미군 육군부와 공군부를 합친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은 엄격하고 냉정한 인물이었음에도, 일본과의 전쟁에서 훨씬 더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져 갔다. “인간의 평범한 삶에 미치는 효과에서 국제적인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고 완전하게 할 수도 있다. 프랑켄슈타인이거나 세계 평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는 핵폭탄이 악마 같은 무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더 많은 희생을 피하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핵폭탄을 투하할지, 투하한다면 언제 어디에 투하해야 할지를 트루먼 대통령과 결정해야 했다. 윤리적 가치와, 국익을 위한 냉혹한 힘의 사용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태평양 전략폭력 사령부 수장이었던 칼 스파츠는 스팀슨 장관이 서명한 핵폭탄 투하 명령서를 받은 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임무를 조용하고 충실하게 준비했다. 작전명은 ‘몰락 작전’.

(왼쪽부터) 미국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사령관 칼 스파츠,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까치 출판사 제공

그는 처음 핵폭탄 투하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일제와 일본군이 항복을 거부하고 ‘1억 옥쇄’ ‘본토 결전’ 운운하며 항전을 거듭 천명하자 핵폭탄 투하 계획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중에 눈을 감을 때까지 엄청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7월26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일본 군부는 ‘최후통첩’ 격인 포츠담선언을 격렬히 비난한 뒤, 언론을 통해서 “묵살”하고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 트루먼 대통령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반응이었다.

“(8월6일) 8시15분 15초, 폭탄 투하실의 문이 열리고, 리틀 보이가 떨어진다. 티비츠는 비행기를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돌린다. 43초 후 조종석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충격파가 비행기를 때리고, 티비츠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소리친다. ‘대공포!’ 뒤를 돌아보니 에놀라 게이를 향해, 훗날 그의 회상에 따르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끔찍하게’ 솟구쳐 오르는 구름이 보인다. 아래쪽에서는 히로시마가 타르 양동이처럼 검게 끓어오른다.”

결국 8월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 ‘리틀 보이’가 투하됐다. 인류 최초의 원폭 투하였다. 7만명이 즉사했고, 또 다른 약 7만명은 좀더 천천히 이 세상을 떠났다. 다시 사흘 뒤인 8월9일 규슈의 나가사키에도 핵폭탄 ‘팻 맨’이 투하됐다. 하루 전에는 휴전 협상을 기대했던 소련군이 대대적으로 만주로 침공을 개시했다.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전쟁 막바지 최고전쟁지도자회의 참석자 6인 가운데 일본의 항복을 바라고 추진하려 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최후의 항전이나 결전이 아니라 오히려 항복만이 일본과 덴노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고, 핵폭탄 투하 후에도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한 군인들에 맞서 히로히토 덴노의 결단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8월15일 정오 일본 전역에서 ‘라디오 도쿄’를 통해 히로히토 덴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생각하건대, 이제부터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진실로 심상치가 않다. 너희 신하와 백성의 충정은 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곤란을 감당해내고, 참아야 할 곤란을 참음으로써 만대를 위한 태평시대를 열고자 한다.”

에번 토머스/ 조행복 옮김/ 까치/ 2만2000원

작가이자 기자인 저자는 책 ‘항복의 길’에서 1945년 수백만명의 운명을 쥐고 있던 미국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과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사령관 칼 스파츠,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세 사람의 동선과 심리적 고뇌를 중심으로 2차 대전 막바지 원자폭탄 투하 및 일제 항복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했다.

과연 미국이 전쟁 막바지에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한 것은 옳았을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이 같은 질문은 핵폭탄을 투하할 필요가 없었다거나 핵폭탄을 2기까지 투하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일본 우익들은 이 같은 질문을 확대하고 비약해 자신들을 전쟁의 또 다른 피해자, 희생자라는 프레임을 재가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진실은 달랐다. 핵폭탄이 2기나 투하되고 소련군이 전격적으로 만주전선에 참전했던 8월9일 아침에도, 일본 제국을 이끄는 최고전쟁지도회의는 항복 여부를 두고 끝내 입장을 모으지 못했다. 오히려 육군을 지휘한 가장 강경한 지도자들은 전쟁을 계속하기를, 자살을 각오하고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싸우길 원했다. 심지어 일본 군부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기도 했다.

1945년 뜨거운 여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세 사람 스팀슨과 스파츠, 도고. 저자는 이들에 대해 인간의 모순적 운명 앞에서 고통스러운 내면의 전쟁을 벌인 영웅이었다고 상찬한다. “일본의 항복은 큰 희생을 치른 뒤에 찾아왔다. 양측의 결정권자들은 희망적인 생각과 심리학적인 부인에 빠졌다. 승자에게도 마음의 평안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수십만명, 어쩌면 수백만명이 되었을지도 모를 목숨을 더 잃기 전에 항복했다. 스팀슨과 스파츠, 도고는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끝내 성공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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