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 소송 제기… 비록 패소했지만 결실
오바마 정부, ‘임금 남녀차별 금지법’ 시행
미국에서 남녀 근로자의 임금 차별 철폐를 이끌어낸 상징적 인물인 릴리 레드베터(Lilly Ledbetter)가 86세를 일기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레드베터의 요구를 받아들여 임기 중 남녀평등 임금법, 일명 ‘레드베터법’을 시행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14일(현지시간) AP 통신에 따르면 레드베터는 지난 12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고인이 생애 말년에 극심한 호흡 부전으로 고생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1938년 미 남부 앨라배마주(州) 잭슨빌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 후 결혼해 두 아이를 낳은 고인은 주부로서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다가 자식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사회 생활에 뛰어들었다. 1979년 41세이던 고인은 타이어 회사 굿이어(Goodyear)에 입사했다. 앨라배마에 있는 굿이어 공장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했다.
한 회사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며 직장 내에서의 입지도 탄탄해진 고인은 1998년 우연히 사무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한 장의 쪽지를 발견했다. 앨라배마 굿이어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임금이 죽 적혀 있었다. 고인은 1979년 그와 함께 입사한 남자 근로자들이 훨씬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충격에 빠졌다. 나름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다고 여기며 자부심을 갖고 일해왔는데 실은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어온 것이다.
고인은 어떻게 대응할까 한참을 고민한 뒤 그해 11월 회사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냈다.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남자 입사 동기들과 똑같이 일했지만 받지 못한 임금 약 22만달러를 반환하라는 주장을 폈다. 1심에선 이겼으나 회사 측의 항소와 상고로 재판은 길게 이어졌다. 2007년 연방대법원은 결국 원고 패소 판결로 사건을 종결했다. ‘못 받은 임금을 돌려달라’는 고인의 요구는 정당하나 소송 제기가 너무 늦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한마디로 ‘소멸시효가 이미 지났다’는 것이었다.
대법관들 가운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2020년 사망)가 반대 의견을 낸 것이 그나마 소득이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동료 직원들의 임금 수준에 관한 정보는 보안 사항으로 비교가 불가능하다”며 “임금 차별은 본인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논리를 폈다. 고인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는 소멸시효를 연장해야 한다는 취지였으나 다른 대법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가 백악관에 입성해 가장 먼저 서명한 법안은 다름아닌 남녀평등 임금 법안, 일명 레드베터 방지법이었다. 성별을 이유로 임금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는 내용이 법안의 핵심이었다. 오바마는 법률안 서명식에서 고인을 가리켜 “다음 세대를 위해 옳다고 여기는 일을 위해 지금까지 싸워온 분”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고인도 백악관의 초청을 받아 오바마 바로 곁에서 법안의 서명 과정을 지켜봤다.
고인의 사연은 국내에서도 ‘기나긴 승리: 골리앗과 투쟁한 한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2014)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자서전을 통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최근에는 그 생애를 소재로 한 영화 ‘릴리’가 미국에서 개봉하기도 했다. 오바마는 고인의 별세 소식을 접한 뒤 성명을 통해 “릴리 레드베터는 유명인이 되려고 한 적이 없다”며 “그저 자신의 노력에 대해 남자와 같은 대가를 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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