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傭兵). 전쟁과 관련 없는 외부인이지만, 돈을 받고 싸워주는 군인을 이르는 말이다. 프로 스포츠에서 외국인 선수 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그들을 ‘용병’이라고 부르곤 했다. 다만 용병이란 단어에 비하의 어감이 담겨있다는 지적이 있어 이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때때로 용병이란 단어를 쓰고 싶게 만드는 외국인 선수들이 있다. 팀의 한해 농사가 좌우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이 먼저라며 출전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지난해 플레이오프에서 2승 뒤 3연패를 당하며 ‘리버스 스윕’의 희생양이 됐던 NC. 정규시즌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페디는 5차전에도 등판하지 않았다. 1차전에선 6이닝 동안 탈삼진 12개를 솎아내며 승리투수가 됐던 페디는 로테이션 상으로는 5차전에는 등판해야 하지만, 선발 등판을 하지 않았고 불펜에서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NC는 2승을 먼저 거두고도 3연패로 물러나야 했다. 일부에서는 페디가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러브콜을 받고 몸을 사린 게 아니냐, 태업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올해 플레이오프에서 LG와 함께 치열하게 한국시리즈 진출을 놓고 다투고 있는 삼성에는 외국인 투수가 1명뿐이다. 올 시즌 삼성의 외국인 에이스로 활약한 코너 시볼드는 정규시즌 막판 당한 부상으로 아직도 개점휴업 중이다. 현재 코너는 미국에서 머물고 있다. 한국시리즈 엔트리 합류를 목표로 치료에 전념하겠다며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박진만 감독은 지난 17일 플레이오프 3차전을 앞두고 “한국보단 가족과 주치의가 있는 미국에서 치료하는 것이 낫다는 게 구단의 판단”이라면서 “코너의 한국시리즈 엔트리 합류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 한국시리즈는 사흘 정도 남았다. 18일 우천 취소 가능성, 5차전까지 시리즈가 이어질 경우 일정이 밀리는 등의 변수를 고려해도 일주일 안에는 무조건 한국시리즈 1차전이 치러진다. 사람의 몸이 부상에서 완쾌했다고 해도 미국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던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아니다. 시차 적응도 해야하고, 실전 투구를 위한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한다. 아직도 미국에 있다는 것은 사실상 한국시리즈에서는 못 던진다고 봐야 한다. 코너 역시 외국인 선수가 아닌 용병으로 불릴 만한 시즌 막판 행보다.
페디나 코너와는 달리 이렇게 자주, 이렇게 많이 던져도 되나 싶을 만큼 매경기 투혼을 발휘하는 외국인 투수가 있다. LG의 엘리저 에르난데스(베네수엘라)가 그 주인공. 올 시즌 케이시 켈리의 대체 외국인 투수로 KBO리그에 입성한 에르난데스는 가을야구 들어 불펜투수로 전업했고, 준플레이오프 5경기에 모두 등판하는 투혼을 발휘하며 LG를 플레이오프 무대까지 끌어올렸다. 준PO 5경기에서 7.1이닝 동안 내준 점수는 0. 피안타 5개, 볼넷 3개를 내주긴 했지만, 탈삼진 10개를 솎아내며 KT 타선을 꽁꽁 막아냈다. 불펜진이 연쇄 부진에 빠진 LG로선 에르난데스가 없었다면 이미 진작에 가을야구는 끝났을 것이다.
플레이오프에선 1,2차전 대패를 당하는 바람에 에르난데스가 등판할 타이밍이 없었다. 그덕에 5일간 푹 쉰 에르난데스는 17일 3차전에서 6회 1사에 등판해 9회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 잡아냈다. 1-0의 살얼음판 리드 상황에서, 자신이 무너지면 곧 LG의 가을야구가 끝나는 상황 속에서도 에르난데스의 투구는 거침없었다. 3.2이닝 동안 피안타 2개, 볼넷 1개만 내주고 탈삼진 5개를 솎아내며 1-0 리드를 끝까지 지켜냈다. 9회엔 어떤 변수도 생기지 않게 아웃카운트 3개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는 장면은 이날 경기의 ‘백미’였다.
경기 뒤 에르난데스에게 물었다. 일부 외국인 선수들은 계약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몸이 먼저라며 몸을 사리곤 한다고, 이토록 열심히 던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돌아온 대답은 인터뷰 내내 쿨했던 에르난데스와 딱 어울렸다. “내년 계약 보장 여부는 잘 모르겠다. 팬들이, 구단 코칭스태프와 프런트 등 모든 사람들이 선수들을 챙겨주고 있다. 그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다. 그런 마음으로 야구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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