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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우산도 없이 빗길을 가는데
누군가 다가와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곁눈질로 보니 희망이다

그도 온몸이 빗물에 젖어 떨고 있었지만
처량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깨우친 자의 얼굴처럼 고요했다

어딜 가는 길이오?
내 물음에 희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이 진흙탕 빗길이 끝나는 곳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소
그와 함께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오

빗줄기가 더욱 거세어졌다
내리막 빗길 따라 코스모스가 따라 걸었다
나는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길이 끝나는 강가를 향해 계속 걸었다

우산도 없이 빗길을 걸을 때, 유난히 외롭고 고단할 때, 그럴 때는 절망보다 희망이 좀 나서 주면 좋겠다. 마음 한구석 가만히 숨죽이던 희망이 보란 듯 일어나 동행해 준다면. 꼭 만나야 할 귀한 사람, 그 사람과의 새로운 여정 같은 걸 상기시켜 준다면. 보다 힘을 내어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진흙탕 빗길이 끝나는 곳을 향해.

 

여태껏 나는 대체로 희망보다 절망이나 좌절과 더 친하게 지낸 것 같다. 때문에 내 안의 희망은 갈수록 숫기를 잃고 나서기를 저어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제는 희망과도 좀 친해져야겠어, 하는 생각을 요즘 부쩍 자주 한다. 친해지는 데에는 으레 노력이 필요할 텐데…. 매사 “깨우친 자의 얼굴처럼 고요”한 희망과 아무것도 깨우치지 못한 나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우선은 가벼운 질문을 건네 보는 것도 좋겠지. 어딜 가는 길이야? 모처럼 용기를 내어 건넨 나의 물음에 희망은 희망답게 조용히 입을 열 것이다.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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