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비인상·미군철수 압박 노골화
자강기회로 활용하는 역발상 필요
가치외교 국익 우선으로 전환해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가장 잘 다뤘던 지도자로 꼽힌다. 아베는 2016년 11월 미 대선이 끝난 지 9일 만에 뉴욕 트럼프타워로 날아가 트럼프 당선인을 만났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가 두 달 남은 상황에서 외교 관례를 깬 파격 행보였다. 아베는 회고록에서 “일본이 (트럼프의) 표적이 되면 나라 전체가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대화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고 했다. 두 사람은 골프장에서 다섯 차례나 함께하며 ‘영혼의 친구’로 불릴 정도로 친분을 쌓았다. 정상회담은 14차례, 공식전화통화도 37차례에 이른다.
아베는 우리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지만 국제정치무대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하나로 묶어 중국을 포위하는 인도태평양 구상을 트럼프 1기 시절 양국 공동의 외교전략으로 완성했다. 그 중심축인 미, 일, 인도, 호주 등 4개국의 안보협의체 ‘쿼드’도 출범시키며 일본의 위상과 영향력을 키웠다. 많은 돈이 드는 세계경찰 노릇을 기피하는 트럼프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2017년 북한 도발이 한창일 때 트럼프는 시도 때도 없이 아베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 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도 아베는 트럼프에게 수시로 북한의 비핵화 검증문제를 상기시키며 협상결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가 주일미군은 물론이고 주한미군 철수까지 포기한 것도 아베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사이 한국외교는 존재감이 희미해졌고 북핵위협의 최대 피해자이면서 비핵화 논의에서 패싱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트럼프 2기가 현실로 닥치면서 한국안보와 외교 악몽이 되풀이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트럼프는 1기 때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 실무를 맡았던 앨릭스 웡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에 발탁했다. 다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북·미 협상 재개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트럼프가 보기에 한반도 평화가 진전되면 역내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고 북·러 밀착도 견제할 수 있다. 협상은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핵 동결과 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김정은이 이미 핵 고도화로 몸값을 키운 만큼 트럼프는 주한미군 철수 혹은 감축 카드를 동원할 수도 있다. 한국안보로서는 재앙에 가깝다.
이제 트럼프 2기에 대비해 외교·안보전략을 새로 짜고 주요 현안마다 최악의 상황까지 상정한 대비책도 준비해야 할 때다. 가치·이념에 경도된 외교 노선은 실사구시로 국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전환하는 게 급선무다. 트럼프의 대외정책과 정세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한국이 비핵화 논의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기민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꽁꽁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대화와 화해의 물꼬를 트고 중·러 관계도 개선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트럼프의 세계경찰 포기 선언은 자주국방과 안보역량을 키우는 기회로 삼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정부는 현 재래전력과 핵전력에서 미군의 비중을 정밀하게 따져 대미 의존도를 낮춰나가야 한다. 국방비를 미국과 비슷한 국내총생산(GDP)의 3% 중반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그동안 다진 한·미동맹을 최대한 활용해 방어하되 트럼프의 청구서를 마냥 외면하기 힘들다면 상응하는 대가를 챙겨야 한다. 예컨대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일본처럼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이나 우라늄 농축 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
거칠고 예측을 불허하는 협상 스타일에도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그는 취임도 하기 전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 신흥경제국 연합체 브릭스(BRICS)를 향해 고율의 관세를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불법이민과 마약유입 등 무역과는 거리가 먼 현안과 달러패권 등 통화정책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세 폭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대미 무역흑자 8위인 우리도 트럼프의 관세 표적 사거리에 있고 비슷한 처지에 내몰릴 수 있다. 이를 막으려면 미리 원유 등 미국산 수입을 확대해 대미 흑자폭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트럼프가 ‘톱다운’ 방식의 협상을 좋아하는 만큼 안보·경제·통상 현안을 한꺼번에 테이블에 올려 큰 그림 속에서 국익을 키우는 전략이 절실하다. 아베가 보여줬듯이 트럼프시대는 외려 국력을 키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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