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터널에 갇힌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어제 담화문에서 “비상시에도 국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과 그 부수 법안의 통과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했다. 한 총리는 “정부가 먼저 몸을 낮추겠다”며 국회의 협조를 요청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감액 예산안 사태가 야당의 사과 없인 협상은 없다는 기존 입장을 굽힐 만큼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실제 정치권의 탄핵공방으로 내년도 예산안 논의가 무기한 중단되면서 사상 초유의 ‘준예산’ 우려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29일 정부 원안에서 4조1000억원을 줄인 677조4000억원의 내년도 예산안을 단독처리했다. 그러자 우원식 국회의장은 본회의 상정을 미룬 채 10일까지 여야의 합의를 요청했다.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이 불난 데 기름을 끼얹었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령 선포 이유 가운데 하나로 야당의 ‘예산 폭거’를 들면서 협상의 여지는 더 줄어들었다.
준예산은 1960년 개헌과 함께 도입됐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12월31일까지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준예산이 불가피하다. 준예산을 짜게 되면 공무원 급여 등 정부 부문의 경상경비와 계속 사업비만 올해 예산에 준해 집행할 뿐 정부의 새해 재정집행 계획 대부분이 중단된다. 국가 연구개발(R&D) 예산과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상당수는 집행이 불가능해진다. 서민지원 등 복지 지출도 타격을 입는다. 국가신인도의 추락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국정 마비 사태가 빚어지는 셈이다.
정치가 나라 살림의 발목을 잡고 국민의 일상과 국가 경제를 망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정부 예산안의 법정처리 시한(2일)은 이미 지났다. 안팎의 엄중한 경제상황을 고려해 여야는 예산안 협의를 서둘러야 한다. 무엇보다 의회 권력을 쥔 거대 야당이 몽니를 부려선 안 될 것이다. 아울러 반도체특별법과 재건축초과이익환수폐지법 등 경제·민생 관련 법안 처리도 더는 지체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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