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머리 치는 데 1분도 안 걸렸지만, 그와 같은 머리 다시 만드는 데 100년도 부족” 평가
1차 세계대전 당시 입대해 숨진 영국 과학자 모즐리 덕에 ‘과학기술자 병역특례’제도 생겨나
‘유나바머’로 악명 떨친 폭탄 테러범은 천재 수학자
과학자, 인간의 과학사/ 최성우/ 지노/ 1만9000원
영국 과학자 모즐리(1887∼1915)는 X선 산란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원자번호와 원자핵의 전하량 사이 관계를 밝혀서 원자구조론 등에 크게 기여했다. 이른바 ‘모즐리의 법칙’은 원소들의 정확한 원자번호를 결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멘델레예프(1834∼1907)가 작성한 원소주기율표상의 미발견 원소들을 확인하고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창 중요한 연구성과를 내던 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입대했고, 갈리폴리 전투에 통신병으로 참전했다 사망했다. 이 때문에 유력했던 노벨상 수상은 물 건너갔고, 전도유망한 물리학자를 잃은 영국은 물론 세계 과학계의 손실도 컸다.
스승이자 1908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러더퍼드(1871∼1937)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과학 인재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 과학 연구를 계속하는 게 나라에 더욱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회 등에 호소했다. 결국 영국 의회와 정부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른 나라에도 퍼졌다. 우리나라도 시행 중인 과학기술자 병역특례(이공계 대체복무제도)가 생긴 배경이다.
신간 ‘과학자, 인간의 과학사’(지노, 1만9000원)는 과학이란 인간 세상과 동떨어져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과학자와 기술자, 주변 인물들에 관한 30여 편의 과학사 이야기를 총 4부에 걸쳐 소개한다.
1부 ‘불운의 과학자, 잊힌 과학자’에서는 모즐리와 같이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과학자, 여러 이유로 불우하게 지냈거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이들을 다룬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추앙받지만 프랑스대혁명 당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위대한 화학자 라부아지에(1743∼1794)가 대표적이다.
책에 따르면, 파리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라부아지에는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25세에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됐다. 화학자로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물질이 탄다는 것은 바로 산소와 결합하는 현상’이란 사실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또 1789년 저술한 ‘화학원론’에서 ‘질량보존의 법칙’을 밝혔고, 원소(元素)를 정의하고 오늘날 널리 쓰이는 방식인 물질의 원소기호와 새로운 화학용어들도 제안하는 등 화학 발전의 토대를 굳건히 세웠다.
하지만 그의 본업이 명을 재촉했다. 당시 혁명 직전 프랑스에서 정부를 대신해 세금을 거두는 ‘세금징수관’은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던 대다수 국민에게 공포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발발 후 세금징수관들은 체포돼 법정에 섰는데 그중 한 명이 라부아지에였다. 그는 과학자로서 그동안 국가에 공헌한 점을 들어 정상참작을 호소하고, 중요한 실험을 위해 재판을 2주일만 늦춰달라고 청원했으나 재판장은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부아지에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후 여러 과학자가 그의 죽음을 매우 애석해했다. 특히 유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라그랑주(1736∼1813)는 “그의 머리를 치는 데에는 1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머리를 다시 만드는 데에는 100년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천재 수학자 시어도어 카진스키(1942∼2023)가 폭탄 테러범 ‘유나바머’로 악명을 떨치게 된 이야기도 흥미롭다. 현대 문명이 인류를 파괴한다는 문명 혐오주의자였던 그는 20여년 간 전기와 수도가 없는 숲속 오지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1978년부터 컴퓨터 기술자 등 과학기술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우편물 폭탄테러를 자행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주로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를 공격해 폭파범(Bomber) 단어와 조합해 유나바머로 불렸다. 훗날 동생의 제보로 미국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된 그의 정체가 명문대 교수 출신 천재 수학자로 드러나면서 큰 충격을 안겼다. 시카고의 폴란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카진스키는 어릴 적 지능지수(IQ)가 167에 달했고, 16세에 하버드대 수학과에 들어갔다. 24세에 캘리포니아대 버클리분교(UC버클리) 사상 최연소 수학 교수가 됐으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등으로 인해 교수직을 그만뒀다. 1998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2023년 6월 교도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저자는 “과학의 오용과 첨단기술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와 경고는 그냥 지나쳐버릴 수만은 없고, 연구개발 단계에서부터 이를 사전에 감안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그 우려와 공포가 과장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어 “설령 그러한 우려와 경고가 틀리지 않다고 해도 반(反)과학기술이나 테러와 같은 극단적 방식으로는 어떠한 해결책도 마련할 수가 없다”고 강조한다.
2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과학기술자들’과 3부 ‘과학자의 가족들’, 4부 ‘과학자의 뒷모습’에서도 과학기술 분야 선구자들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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