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아테네 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결승. 상대는 당대 최강인 중국의 왕하오. 상대 전적 6전6패. 모든 이들이 왕하오의 금메달을 확신했지만, 그는 생애 가장 큰 무대에서 기적 같은 승리로 금메달을 따냈다. 2004 아테네 남자단식 결승처럼, 유승민(43) 전 대한탁구협회장이 또 한 번 야권 단일화 실패로 인한 역대 최다 후보 난립이라는 절대적 불리함을 딛고 제42대 대한체육회장에 당선됐다. ‘대이변’이자 또 한 번의 ‘언더독의 반란’이다.
유 당선인은 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총 투표인단 2244명 중 1209명이 참여한 가운데, 417표를 얻어 득표율 34.49%로 당선됐다. ‘사법 리스크’ 속에서도 6명이나 후보가 난립하면서 현직 프리미엄을 누리며 3연임에 성공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던 이기흥 현 회장은 득표율 31.35%(379표)로 2위에 머물렀다. 강태선 서울시체육회장이 216표로 3위, 강신욱 단국대 명예교수 120표, 오주영 전 대한세팍타크로협회장 59표, 김용주 전 강원도체육회 사무총장이 15표로 뒤를 이었다.
어릴 때부터 천부적인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며 ‘탁구 신동’으로 불렸던 유 당선인은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단식 금메달을 차지하며 탁구 인생의 정점을 찍은 유 당선인은 2012 런던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탁구채를 내려놓았다.
2014년 국가대표 코치로 지도자 생활에 발을 들인 유 당선인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하며 스포츠행정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진종오, 장미란 등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한국대표 IOC 선수위원 후보가 된 유 당선자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현장 곳곳을 발품을 팔아가며 유세전에 나섰고, 23명 중 2위에 올라 당당히 IOC 선수위원에 당선됐다.
2019년 5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별세로 공석이 된 대한탁구협회장 보궐 선거에 출마해 회장으로 선출됐다. 2020년 12월까지 남은 임기를 역임한 뒤 이후 회장 선거에 단독으로 출마해 또 한 번 당선됐고, 지난해 9월까지 대한체육회장 선거 출마 의사를 밝히며 12월까지 임기가 남아있던 대한탁구협회장 자리를 사임했다.
이번 대한체육회장 선거는 현직인 이 회장이 채용비리와 업무방해, 횡령, 배임, 금품수수 등 여러 비위 혐의로 검찰과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 속에 치러져 더욱 관심을 모았다. 3연임 도전에 나선 이 회장의 조직표가 워낙 단단해 야권 후보 단일화가 아니면 이 회장의 독주를 막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 야권 단일화 시도가 있었고, 유 당선인도 협상 테이블에 참여했다. 그러나 단일화 방식과 후보를 정하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나왔고, 유 당선자는 테이블을 박차고 나왔다. 당시 유 당선자는 “단일화 과정에서 내 나이가 화두가 됐다. 나이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있고, 연장자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등의 구시대적이고 낡은 사고가 바뀌어야 대한체육회가 바뀐다는 마음으로 단일화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유 당선자는 단일화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IOC 선수위원 당선 때와 마찬가지로 체육 현장을 돌며 바닥 민심을 다졌다. 그의 승부사적인 기질은 이번에도 제대로 먹혔고, 이 현 회장을 38표차로 극적으로 제치고 연간 4400억원에 이르는 체육회 예산 집행의 최종 결정권자이자 총 84개 종목 단체를 관장하는 ‘체육 대통령’에 당선됐다. 유 당선인의 임기는 2029년 2월까지로,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과 아이치·나고야 하계 아시안게임, 2028년 로스앤젤레스 하계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대회를 치러야 한다. 아울러 생활체육 및 학교체육 활성화 등 체육계 현안 과제 해결도 도맡아야 한다.
당선 직후 유 당선인은 “기쁘기도 하지만, 무겁고 부담된다. 체육계의 여러 현안들에 대해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지방체육회의 독립적인 행정과 예산집행, 아수라장이 되어있는 학교체육 정상화 등을 최우선으로 해결하기 위해 뛰겠다”라고 덧붙였다.
단일화 실패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로 유 당선인은 ‘진정성’을 꼽았다. 그는 “2004 아테네 올림픽 준비 때보다도 더 많은 힘을 쏟았다. 그래서 아까 대기실에서 개표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마음이 편했다”라면서 “무엇보다 체육인들이 변화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게 이번 결과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 열망에 대해 화답하기 위해 앞으로 열심히 뛰겠다”고 말했다.
이 현 회장 체제에서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이에 대해 유 당선인은 “저는 아직까지 적을 만든 적이 없다. 부드럽게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와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체육 현장의 현안들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그게 정부와의 대화로 해결될 수 있다면 빠르게 대화에 나서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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