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에 숨은 사찰 강화 정수사/고즈넉한 산사 툇마루 운치넘쳐/마니산 정수 약수 마시고 뒷산 산책/전등사엔 열매 맺지 않는 은행나무·나부상 전설 ‘흥미’/광성보에선 아이들과 역사 공부/얼어붙은 동막해변에선 인생 노을 만나
가느다란 나무통 따라 졸졸졸 흘러내리는 약수. 섭씨 영하 15도 강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틈 사이 얼음 뚫고 솟아올라 커다란 돌 바구니 넘치도록 채운다. 신비로운 저 물 한 모금 마시면 지친 영혼의 갈증도 해소될까. 구도자의 심정으로 한 바가지 듬뿍 퍼 올려 목을 축이고 눈 쌓인 한겨울 산사의 정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요하다. 들리는 것은 가끔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그리고 땅으로 돌아가는 게 못내 서러워 바짝 마른 채로 나뭇가지 매달린 이파리들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뿐. 혼자 가끔 들여다보고 싶은 곳, 강화 정수사 작은 마당 천천히 거닐다 햇볕 따뜻한 툇마루에 앉아 내 마음도 들여다본다.
◆나만 알고 싶은 정수사
시인 안도현은 ‘화암사, 내 사랑’에서 ‘잘 늙은 절 한 재…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라고 노래한다. 전북 완주군 불명산 자락 시루봉에 숨어 있는 화암사는 그에게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다. 인천 강화군 마니산 동쪽 기슭에 묻힌 정수사도 그런 곳이다.
차 한 대 지나는 구불구불한 좁은 도로 따라 10여분 오르면 아담한 절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다. 정면에 작은 대웅보전이 앉았고 그 옆 계단 위엔 더 작은 삼성각, 왼쪽 암반 꼭대기엔 오백나한전과 관음전이 한 몸으로 붙어 있다. 암반 아래로 맑은 약수가 흐른다. 돌 틈으로 나오는 ‘석간수’로 ‘마니산 정수 약수’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백두산과 한라산 사이 중심인 마니산의 첫 사찰 정수사 약수를 마시면 심신이 강건해진단다. 솔깃한 설명에 이끌려 얼음장처럼 차가운 약수 한 모금 마시자 정신이 번쩍 들더니 건강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손끝, 발끝까지 전해지는 기분이다.
조선 초기 다승(茶僧)으로 명성이 높던 함허대사가 세종 5년(1423) 절을 중창하면서 바위틈에서 약수를 발견했다. 함허는 차를 끓이는 물로는 석간수를 최고로 여겼는데 산의 정기가 모여 담백하고 맑으며 찬 기운을 뿜기 때문이란다. 설명이 그럴듯하지만 아마도 미네랄이 풍부해 차 맛이 더 좋아지는 게 아닐까. 절의 원래 한자는 ‘정수사(精修寺)’인데 함허는 맑은 물이 솟아오른다는 뜻을 담아 ‘정수사(淨水寺)’라 불렀다.
가파른 계단 올라 오백나한전 앞에 서면 강화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헌종 14년(1848)부터는 비구니 승려들이 기거했다.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 대웅보전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독특한 맞배지붕이다. 특히 앞면 중앙 출입문의 꽃 창살이 특이하게 통판에 조각됐고 꽃병에 연꽃과 모란이 담겼다. 또 건물 앞면에 툇마루가 있는 특이한 법당 구조가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대웅보전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꼭 걸어보기를. 수령 300년 넘은 높이 24m 느티나무가 아주 늠름하다. 또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인사하는 장독대 너머로 밥 짓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니 고향 마을에 온 듯 정겹다. 10여분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강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운 함허의 승탑을 만난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다 승탑을 세웠을까. 이유가 있다. 조선 영조 35년(1759)에 발간된 ‘여지도서’는 함허와 각시바위에 얽힌 애틋한 얘기를 담고 있다.
함허는 무학대사의 제자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큰스님. 불교가 배척당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시절, 함허는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고 정수사 계곡에서 매일 수행했다. 어느 날 혼인한 지 얼마 안 돼 집을 나간 남편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부인이 수소문 끝에 함허를 찾아와 함께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하지만 함허는 계곡 바위에 ‘함허동천(涵虛洞天)’을 새기며 끝내 뒤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 함허는 속세의 때가 묻지 않아 수도자가 삼매경에 들 수 있는 이곳을 떠날 수 없음을 이렇게 강변했다.
이에 좌절한 부인은 영혼이나마 남편 곁에 남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졌고 바위로 변했는데 사람들이 ‘각시바위’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사연 탓인지 함허가 정수사에서 입적한 뒤 각시바위가 바라다보이는 이곳에 부도탑이 조성됐다. 하지만 각시바위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물이 맑아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가 높은 함허동천의 너럭바위에는 지금도 이 글자가 새겨져 대사의 오래전 얘기를 전한다.
◆열매 맺지 않는 전등사 은행나무
정수사에서 전등사는 차로 약 20분 거리라 함께 둘러보기 좋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창건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절은 삼랑성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단군의 세 아들 부소, 부우, 부여가 축조했다는 설화가 담겼다. 역사만큼 다양한 얘기가 전해진다. 대웅보전 마당으로 들어서기 직전 왼쪽 비탈에 은행나무 암수 한 쌍, 700살 노승나무와 300살 동자승나무 마주보고 있는데 열매를 맺지 않는다. 조선 철종 시절, 관아에서 수확량의 두배인 은행 스무 가마니를 바치라고 무리하게 요구하자 전등사 노승은 도력이 높은 백련사 승려 추송에게 열매를 더 열리는 기도를 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3일 특별기도가 끝나는 날 관리들의 눈이 갑자기 부어올랐고 추송은 “이제 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이후 두 나무에서 더 이상 열매를 볼 수 없었단다.
대웅보전 처마를 자세히 보면 다양한 자세로 지붕을 떠받치는 나부상(裸婦像) 조각들이 보이는데 전등사를 찾는 이들이 잘 모르는 사연이 담겼다. 고향을 떠나 대웅보전 공사를 맡은 도편수는 주막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만 야반도주하고 말았다. 큰 배신감에 분노한 도편수는 영원히 지붕을 떠받치는 고통을 겪도록 여인의 모습을 닮은 나부상을 전등사 지붕 아래 새겼다.
오랜만에 찾은 전등사는 좀 젊어졌다. 곳곳에 서 있는 어린왕자 덕분이다. ‘발굴조각’이란 독특한 기법으로 만든 이영섭 작가의 작품들이다. 흙 마당에 유리원석 등 재료를 묻은 뒤 굳으면 이를 캐내는데 모던하면서도 표면에도 오랜 세월 풍화된 것 같은 흔적이 남아 고찰 풍경에 잘 녹아든다.
◆바다마저 얼려버린 동장군 기세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함께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 고종 3년(1866) 천주교 탄압에 반발해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때 양현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던 프랑스군 160여명을 무찌른 곳이기도 하다. 차로 20분 거리 광성보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871년)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역사가 깃든 곳으로, 방학 때 아이들과 역사 공부하기 좋다. 울창한 소나무숲 길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등을 만난다.
볼 곳 많아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출출하다. 정수사 인근 소문난 맛집 마니산산채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수한 산나물 냄새가 비강으로 마구 파고든다. 천장의 고풍스러운 서까래와 전선을 연결하는 하얀 애자는 한눈에도 범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고종 16년(1879)에 건축됐으니 146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맛은 어떨까. 단군신화솥밥이 대표 메뉴로 비주얼부터 다르다. 쑥, 미역귀, 다시마, 울타리콩, 백목이버섯, 당근, 마늘 등 몸에 좋은 식재료 듬뿍 넣어 갓 지은 고슬고슬한 솥밥 한 수저 입안으로 밀어넣자 밥이 아니라 약을 먹는 기분이다. 가시오가피, 우엉, 당귀삼채, 연근샐러드, 도라지 등 밑반찬도 푸짐하다. 함께 주문한 떡갈비는 씹을 것도 사라져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든든하게 먹고 겨울바다로 나선다. 강화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막해변이다. 동장군 기세가 대단하다. 며칠 동안 섭씨 영하 15도를 웃돌더니 광활한 바다마저 얼려 버렸다. 동막해변은 넓은 갯벌로 물이 얕아 겨울이면 이런 진풍경이 펼쳐진다. 해안길 따라 걷다 분오리돈대에 오르자 어선들이 꼼짝 못 하고 얼음 속에 갇힌 분오항과 동막해변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장화리 일몰조망지는 분오리돈대와 함께 손꼽히는 저녁노을 명소.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겨울이라 더 맑고 투명한 공기는 환상적인 풍경을 가슴에 선사해 겨울여행을 낭만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