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V-E 데이(day)’ 그리고 ‘V-J 데이’를 기념일로 기린다. V-E란 ‘유럽에서의 승리’(Victory in Europe)를 의미한다. 1945년 5월8일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는 뜻이 담겨 있다. V-J란 ‘일본을 상대로 한 승리’(Victory over Japan)를 의미한다. 2차대전의 일부인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국이 일본을 무찌른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V-E 데이와 달리 V-J 데이는 두 날짜가 혼재한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에선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15일이 V-J 데이로 통한다. 우리에게는 광복절이다. 반면 미국은 일본 정부 대표가 미 육군 원수이자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항복 문서에 서명한 1945년 9월2일을 V-J 데이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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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7일 일본이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전투기와 폭격기로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을 때 미국인이 느낀 분노는 대단했다. 대비가 전혀 안 돼 있던 미국은 군인와 민간인을 더해 24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군용기가 지상에서 파괴되고 거대한 전함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격분한 나머지 진주만 공습에 당한 날을 미국의 ‘국치일’(Day of Infamy)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반드시 치욕을 되갚아 줄 것을 다짐했다. 그로부터 거의 4년이 지난 1945년 8월 미국은 막 개발한 원자폭탄 두 개를 일본 상공에서 떨어뜨렸다. ‘결사 항전’을 외치던 일본 군부도 이 신무기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압도됐다. 그해 9월2일 정식 항복 문서 조인 이후 일본은 미군의 피점령지 신세가 됐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 대한 미국인의 적대감은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조치만 봐도 알 수 있다. 루스벨트는 진주만 공습 이듬해인 1942년 2월19일 행정명령을 통해 일본계 미국인 12만여명을 강제로 미국 서부의 수용소에 억류했다. 이들이 미국 국익에 반하는 간첩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의심을 이유로 들었다. 2차대전 때 미국의 다른 적국인 독일이나 이탈리아계 주민들에게 내려진 조치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가혹했다. 전후 미·일 양국이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동맹국이 된 뒤에도 미국 행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선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이 미국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떠오르며 미국도 입장을 바꿨다. 1988년 당시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잘못을 인정한다”며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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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2일이면 V-J 데이 80주년을 맞는다. 그 동안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의 인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일 백악관을 찾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단호히 “우리는 일본을 사랑한다”(We love Japan)고 말했다. 국치일 운운할 정도로 분노했던 과거사가 무색할 지경이다. 하긴, 진주만 공습 80주년인 2021년 12월7일 미 국방부는 성명에서 “옛 적들이 이제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Old enemies are now the closest of friends)고 밝혔다. 공습 당시 희생자들을 추모하면서도 가해자인 ‘일본’(Japan)이란 나라 이름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화기애애한 미·일 정상회담 그리고 한층 더 강력해진 미·일 동맹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심정이 편치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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