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 현장에 지문·범행 도구 안 남겼지만 샌들 족적은 생각 못 해
장기 미제 강력 사건으로 베일에 싸여 있던 영월 농민회 간사 피살사건의 전모가 20년 만에 드러났다.
범행 현장의 피 묻은 족적(샌들)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돼 재판에 넘겨진 A(60·당시 39세)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증거로 압수된 A씨의 샌들 한 켤레는 몰수됐다.
20년 만에 밝혀진 피 묻은 족적의 주인인 A씨의 범행은 치밀하고도 잔혹했다.
한 여성을 둘러싼 치정이 강력한 범행의 동기가 됐다.
춘천지법 영월지원 형사1부 1심 판결을 통해 드러난 20년 전 A씨의 범행을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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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혹하게 살해된 피해자…유일한 단서는 피 묻은 족적뿐
2004년 8월 9일 오후 6시께 영월군 영월읍 농민회 사무실에서 한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피를 흘린 채 숨진 남성은 영월 영농조합 소속 B(당시 41세)씨였다. 숨진 B씨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동료 농민회원 K(당시 38세)씨였다.
숨진 B씨의 모습은 참혹했다.
머리와 얼굴을 둔기 등으로 얻어맞았고, 흉기로 목을 12차례, 배를 2차례 찔렸다.
부검 결과 머리 손상과 경부자창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이른바 '영월 농민회 간사 피살' 사건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현장에는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족적(발자국)이 다수 발견됐다. 족적 분석 결과 특정 상표의 샌들 족적으로 파악됐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공간인 B씨가 있던 컴퓨터 방을 족적의 주인은 거실을 거쳐 주방 앞문 → 주방 뒷문 → 다시 주방 앞문 → 컴퓨터 방으로 이동하는 등 이곳저곳을 신발을 신은 채 돌아다녔다.
족적이 생성된 후 그 위로 피해자가 쓰려졌고, 족적의 주인은 신발 바닥에 혈액이 묻은 상태로 문지방을 넘기도 했다.
다수의 족적과 피해자 혈흔 각각의 위치·형태·순서 등의 복합적 분석으로 볼 때 족적을 남긴 사람이 범인인 가능성이 컸다.
당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족적의 주인은 바로 A씨였다.
◇ '묘한 삼각관계', 'B씨 좋아한다' 말에 적개심…범행 동기는 '치정'
공소장에 따르면 A씨는 사촌 동생의 소개로 알게 된 C(당시 35세)씨와는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내연관계였다. 당시 영월에 살던 C씨는 2004년 6월 무렵 피해자인 B씨와도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평소 교제 중인 여성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A씨가 이를 알게 됐고, C씨가 B씨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를 많이 좋아한다'고 말하자 다투기도 했다.
B씨에게 적개심을 갖게 된 A씨는 2004년 8월 6일부터 10일까지 영월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이 사이에 B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전날(5일)에는 영월을 몰래 방문해 농민회 일을 하는 B씨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휴가지인 미사리 계곡에서 기회를 엿보던 A씨는 범행 당일인 8월 9일 오후 2시에서 오후 3시 45분 사이 가족들과 물놀이하던 중 계곡을 벗어나 B씨가 있는 농민회 사무실로 갔다.
계곡 입구에서 범행 현장인 농민회 사무실까지의 거리는 26.3㎞, 차량으로 30여분 소요되는 거리다.
컴퓨터가 설치된 방에 들어간 A씨는 컴퓨터 작업 중이던 B씨에게 다가가 둔기로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치고, 바닥에 쓰러진 B씨의 목과 배를 각각 12차례와 2차례 찔러 살해했다.
A씨의 범행은 치밀했고, 범행 도구와 지문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개의 족적을 남길 정도로 신발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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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적의 주인이 범인'…샌들 돌려받자마자 '폐기' 증거 인멸 드러나
A씨가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서기까지는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범행 현장 목격자나 지문, 범행 도구, 혈액이나 DNA(유전자) 등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사건 발생 나흘째인 8월 12일 수사선상에 올랐던 A씨의 밤색 샌들을 임의 제출 형태로 압수해 추궁했지만 A씨는 알리바이를 제시해 수사망에서 빠져나왔다.
이후 2014년 재수사에 나선 경찰은 유일한 증거인 족적에 다시 주목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분석을 통해 A씨의 샌들 바닥 문양과 범행 현장의 족적이 마모흔이나 손상흔 등 17개의 특징점에서 99.9%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족적의 주인이 범인이라는 결정적 증거였다.
그러나 A씨는 사건 당시 자신은 미사리 계곡에서 가족들과 물놀이하고 있었을 뿐 범행 현장에 간 적이 없고 범행 동기도 없었다고 여전히 혐의를 부인했다.
검경은 A씨의 알리바이를 깨고 범행을 입증할 간접 증거로 여러 정황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범행 시각 미사리 계곡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고 한 사진에 표시된 촬영 시각은 임의 조작이 가능하고, 그 시각 계곡을 벗어난 장소에서 수신된 A씨의 휴대전화 통화 기록은 '계곡에 있었다'는 A씨 주장의 신빙성을 잃게 했다.
수사 초기 압수한 밤색 샌들을 A씨에게 다시 돌려주는 과정에서 경찰의 실수로 수사 참고 목적으로 보관 중인 제2의 샌들을 줬는데, A씨는 이를 곧바로 폐기해 증거물 은폐를 시도했다. A씨는 점점 더 궁지에 몰렸다.
증거 조작 시도는 밤색 샌들로 인해 자신의 범죄가 발각될 우려를 감추고 싶은 강한 의지를 드러낸 행동이라고 이 사건 심리를 맡은 재판부는 판단했다.
재판부는 "밤색 샌들을 신은 A씨가 범행 시각에 범행 현장에 있으면서 불상의 둔기와 예기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됐다"고 판시했다.
피해자인 B씨의 동생은 23일 "참혹하게 돌아가신 형님의 억울한 죽음이 이제야 밝혀졌다"며 "피고인의 항소로 열리는 2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A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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