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도약 가능케 할 열쇠
회로설계·분석 기회 등 제공
탁월한 인재 양성 확대해야
필자는 1987년 석사과정부터 반도체 연구를 해왔으니 내년이면 40년째가 된다. 반도체가 익숙하지만 여전히 신기하다. 광학현미경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트랜지스터가 모여서 어떻게 엄청난 성능을 만들어 낼까? 반도체는 여전히 마법의 돌로 여겨진다. 되돌릴 수 없는 인공지능(AI) 시대에 반도체는 그 중요성을 더한다. 이제 반도체는 산업뿐만 아니라 국가안보에도 중요하다. 그래서 글로벌 반도체 패권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다.
반도체 패권경쟁에는 무엇보다 연구개발(R&D)이 중요하다. 다른 첨단기술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주 52시간 근로시간 제한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리 스스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패권경쟁을 하는 어느 나라도 R&D를 주 52시간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마치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에서 우리만 50km로 속도를 제한하는 것과 유사하다.

52시간 규제가 근로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다만, 첨단기술 분야에서 R&D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탄력적인 근로시간을 적어도 보장해 줘야 한다. 가령, 매주 52시간 대신 6개월 평균 주 52시간으로 제한하는 것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획일적인 주 52시간 근로 제한은 결국 어려운 분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첨단기술 분야를 선도해야 신시장과 양질의 일자리도 만들 수 있고, 특히 청년들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간다. 첨단 분야는 벤처, 중소·중견, 대기업에 걸쳐 있다. 탄력적인 근로시간의 보장은 이들 기업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삶에서도 바쁠 때 장시간 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1990년대는 한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세계 정상으로 대도약한 시기이다. 당시 반도체 선도국인 미국과 일본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대략 2020년경까지 기업에서 실책이 있어도 대체로 큰 성장률을 보였다. 그 당시 우수한 인재가 반도체 분야에 많이 진출했고, 주 52시간이라는 제약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의대 쏠림, 근로 문화 변화, 주 52시간 근로 제한이 첨단 분야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우려가 있다. 근로시간만이라도 탄력적으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제 반도체 분야에서 실질적인 산학연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기업은 산학연 협력에서 눈앞의 작은 이익에 얽매이지 말고 더 크게 회사가 발전할 수 있는 원원 정책으로 과감하게 변모해야 한다. 협력업체와의 협력도 예외가 아니다. 늦었지만 추격자 시대의 전략은 줄이고 선도자 시대의 전략을 늘려야 한다. 추격자 시대 때 경험으로 일을 배운 분들은 여전히 그 시절의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환경이 바뀌었다. 내가,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많은 것을 바꿔야 한다.
희망찬 소식도 있다. 올해 2월 정선에서 개최된 한국반도체학술대회에 1842편의 논문이 제출됐고 심사를 거처 약 77%의 논문만 채택됐다. 최근 국내외 학회 동향과 비교해 볼 때, 논문 편수와 채택률은 놀랍다. 참가자 숫자도 올해 처음 4000명 시대를 열었다. 많은 인재가 키워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간 정부의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 잘 작동한 결과로 생각된다.
인재의 숫자도 중요하지만 탁월한 인재를 키워내는 것은 더 중요하다. 하나의 실효적 방법은 청정실에서 학생들이 직접 자신의 소자를 제작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전국의 공공 반도체 팹들을 연계하여 제조·분석을 지원하는 모아팹 서비스를 2024년 3월에 시작했다. 또한, 학부 때부터 집적회로를 직접 설계할 기회와 제작된 칩을 분석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23년 7월부터 마이 칩(My Chip) 제작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이들 정책은 대학 현장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고 탁월한 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탄력적인 근로시간과 산학 연관의 긴밀한 협력이 바로 우리 반도체 R&D의 새로운 도약을 가능케 할 열쇠이다.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과감한 변화를 모색할 때, 반도체라는 마법의 돌은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의 든든한 초석이 될 것이다.
이종호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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