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관계 넘어 ‘친러 블록’ 편입 의미
김정은이 ‘원 오브 뎀’ 되는 건 리스크
2015년 전승절 때도 막판에 불참 통보
전승절 이전 모스크바 찾을 가능성도
9월 극동지역 방문 시나리오도 거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준비되고 있다고 러시아 정부가 공식 확인하면서 김 위원장 방러 시기와 장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은 27일(현지시간) “김 위원장은 올해 러시아를 방문한다”라며 “현재 방문 내용, 시기, 프로그램에 관해 협상 중이며 합의가 되면 알리겠다”고 밝혔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시나리오는 5월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김 위원장이 참석하는 방안이다.
전승절은 1945년 5월9일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아낸 것을 기념하는 날로 러시아 최대 국경일로 꼽힌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규모가 축소됐지만 크렘린궁 앞 붉은광장에서 대규모 열병식이 개최되는 등 매년 전승절엔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전승절 기념식은 러시아와 우호 관계인 여러 국가의 정상들이 모여 반서방 연대를 과시하는 외교무대로도 기능한다. 특히 올해 전승절은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중시하는 정주년(5년,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에 해당돼 기념식에 더욱 공을 들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러한 전승절 기념식에 김 위원장이 참석한다면 단순히 러시아를 방문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북한이 다자외교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러시아와의 양자 관계를 넘어 친러시아 국가 블록에 편입하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어서다.

현승수 통일연구원 부원장은 “러시아는 북한을 국제무대에서 정상국가로 인정받게 하고, 브릭스(BRICS)나 상하이 협력 기구(SCO)와 같은 다자 기구에 끌어들이고 싶어한다”며 “만약 김 위원장이 러시아 요구에 따라 전승절에 참석한다면 이는 북한의 새로운 외교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에게 전승절 참석은 기회인 동시에 리스크가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여러 국가 정상들 가운데 섞여 ‘원 오브 뎀’으로 비치는 다자외교 무대에 참석한 전례가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양자회담을 통해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대등한 모습처럼 비치는 게 ‘수령제’인 북한의 통치 스타일엔 어울린다는 분석이다.
앞서 러시아와 북한은 2015년에도 김 위원장의 전승절 70주년 기념식 참석을 논의했지만, 막판에 북한이 불참을 통보해 무산된 바 있다. 당시 러시아는 북한 내부 사정을 이유로 발표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다자외교 참석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됐다. 이러한 맥락 위에서 김 위원장이 전승절 이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거론되고 있다.
아예 시점과 장소를 달리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EEF)을 계기로 극동지역에서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만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푸틴 대통령이 EEF에 참석한 후 인근 도시로 이동해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는 방법이다.

북한에 모스크바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전용기가 없어 김 위원장의 모스크바행에 작지 않은 부담이 따른다는 점에서 이 같은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개최된 2023년 9월 북·러 정상회담이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처음으로 대면한 2019년 4월 정상회담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뤄졌다.
다만 극동지역 방문 시나리오에도 맹점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발전된 양국 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효과가 모스크바 방문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두진호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극동지역은 이미 방문한 만큼 김 위원장이 이번엔 러시아의 심장부인 모스크바에 가야 정상으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은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과 관련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김인애 통일부 부대변인은 28일 정례브리핑에서 “김 위원장 방러 가능성에 대해 예단하지 않고 관련 동향을 예의주시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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