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 아쉽지만 10조 추경 추진
산불 등 시급한 분야에 투입 땐
재정투입의 긍정 효과 나올 것
정부가 지난달 30일 10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추경) 추진을 공식화했다. 대내외 악재에 대응하는 ‘필수 추경’ 성격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그동안 여·야·정 합의가 없으면 추경 편성을 할 수 없다고 버티던 정부가 갑작스럽게 추경 추진을 결정한 배경에는 영남권 초대형 산불피해 복구를 위해 재정 투입이 시급하다는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는 지난해 말 ‘12·3 계엄 사태’ 이후 끝 모를 추락 중이다. 소비 심리 위축으로 내수가 얼어붙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압박도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피해를 낸 산불까지 발생했다. 정부가 추경 3대 분야로 재난·재해 대응, 통상 및 인공지능(AI) 경쟁력 강화, 민생 지원을 제시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는 추경의 세부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여야 동의를 전제로 편성할 수 있다는 입장만 밝혔다. 내부적으로는 어느 분야에 얼마가 필요한지 정도는 계산해 봤으니까 10조원이라는 규모도 나왔을 텐데, 입을 닫고 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산불피해 극복, 민생의 절박함과 대외현안의 시급성을 고려하면 ‘필수 추경’이 빠른 속도로 추진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여야가 필수 추경의 취지에 ‘동의’해 준다면 정부도 조속히 관계부처 협의 등을 진행해 추경안을 편성·제출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여야가 ‘10조원 추경’ 자체에 우선 합의해달라는 게 정부의 얘기인데, 쉽지 않아 보인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정부의 추경 추진을 환영하고 나섰다. 반면 ‘소비쿠폰’ 등 35조원 규모의 추경을 요구해 온 더불어민주당은 못마땅한 눈치다. 10조원이라는 추경 규모가 당면한 위기 속에서 민생과 경제를 회복시키고 재난을 극복하는 데 유의미한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야당의 반발을 의식한 것일까. 정부는 추경 공식화 바로 다음날 이번 추경에 대해 “경기 진작용이 아니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1일 시급한 항목을 먼저 처리한 뒤 여야가 각각 원하는 예산을 논의하는 ‘단계적 추경’을 제시하고 나섰다.
당장 산불피해 복구 지원은 필요하니, 여야 이견이 없을 법한 정말 급한 분야에만 우선 최소 규모의 재정투입을 하겠다는 게 정부와 여당의 생각인 듯하다. 그런데 이번 추경 규모가 너무 작아 보인다. 윤석열정부가 내세워 온 ‘건전재정’이라는 고집을 못 버린 탓일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5조∼20조원 규모 추경이 필요하고, 가급적 빨리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얘기한 게 지난 2월이다. 당시 상황에 산불피해가 추가됐는데도 정부가 제시한 추경 규모는 그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이왕 하는 김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우리 경제에 대한 정부의 위기 인식이 너무 안이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지금 우리 경제가 대내외 겹악재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는 지적이 안팎에서 쏟아진다.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줄줄이 하향 조정하고 있다. 영국계 투자은행인 캐피털이코노믹스는 0%대(0.9%)까지 낮췄다.
지난주, 4월을 코앞에 두고 느닷없이 쏟아져 내린 함박눈을 보며 마치 한겨울을 빠져나오지 못한 우리 경제 상황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계엄 사태 이후 우리 경제에 짙게 드리운 안개는 넉 달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자욱하다. 헌법재판소가 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하면 많은 불확실성 중 하나는 해소될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규모는 아쉽겠지만, 야당도 여당의 ‘단계적 추경’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필요하면 또 추경에 나서면 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때인 2020년에는 4차 추경이 이뤄졌다. 일단 이번 추경으로 산불피해 복구와 가장 시급한 분야에 재정이 투입돼 경기 반등의 마중물이 되어줄 수도 있다. ‘건전재정’만 외치다 이번 추경으로 ‘재정투입’이라는 카드의 긍정적 효과를 깨닫게 되면 정부와 여당도 경제 회복에 더 힘을 쏟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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