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조경란의얇은소설] 타인에게 손 내밀기

관련이슈 조경란의 얇은소설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5-04-03 23:00:31 수정 : 2025-04-03 23:00:30

인쇄 메일 url 공유 - +

자신의 사회에서 차별받던 그들
우연히 탈출 같은 짧은 휴가 나서
아무 힘도 없다고 생각한 두 사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힘이 생겨

캐서린 앤 포터, ‘휴가’(‘캐서린 앤 포터, 세계문학 단편선 30’에 수록, 김지현 옮김, 현대문학)

안톤 체호프의 잘 알려진, “달이 빛난다고 말해주지 말고, 깨진 유리 조각에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보여줘라”라는 말은 묘사와 관련돼 있다. 묘사가 없다면 인물이든 배경이든 책장을 넘길 때 독자의 눈에 생생하고 살아 있는 듯 느껴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문장 솜씨만큼이나 대상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관찰과 시선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숲과 강 같은 자연 묘사를 거기서 정말 살아본 듯 필요한 만큼 세세히 쓴 작가의 글을 읽을 때면 부럽고 배우고 싶어진다.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 ‘휴가’를 펼친다면 연필 한 자루가 필요해질지 모른다. 봄이 오는 농경지대와 숲, 거기에 인물의 감정까지 담아 묘사한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싶어져서.

조경란 소설가

내가 한동안 머물게 된 휴가지의 숙소는 옛날식으로 사는 독일인 농부의 집 다락방이었다. 숙박비가 비싸지 않으면서도 아늑한 곳. 가부장적인 이 집엔 뮐러가의 열 명도 넘는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으며 하루 세 번 식사 때마다 혼자서 떡 벌어지게 상을 차려내는 하녀도 있는데, 이상하지만 내 눈에 하녀가 계속 들어왔고 식탁에 앉을 때마다 그 거친 손과 음식들이 그녀의 노동을 상징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하녀는 말도 못하는 데다 몸이 애처롭고 기이한 형태로 뒤틀어져 있었다. 하녀에게 누구도 말을 걸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고립 때문인지 집에서 그녀만이 “유일한 개인”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보였다.

오솔길과 강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산책하며 나는 여기를 떠나올 때와 달리 아픈 응어리들이 차츰 풀려가며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걸 느꼈다. 자연의 들숨과 날숨 속에서, 식물들의 뿌리로 점점 더 단단해져 가는 발밑의 흙에서, 골짜기가 금록색으로 변하는 느리고 미묘한 봄의 징조들을 보면서. 하루는 산책하러 가는데 뒷문 포치 계단에서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던 하녀 오틸리가 내 옷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할 말이 있는 눈으로. 창고 같은 그녀 방에서 나는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프릴 달린 원피스를 입고 웃고 있는 사진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단단한 공동체에서도 외면당하고 있는 오틸리가 하녀가 아니라 이 가부장적인 집안의 큰딸이라는 사실을.

거대하고 풍부한 자연과 대가족 구성원이 등장하는 이 단편이 더 한 편의 현대적 시대극 같이 느껴지는 건 결혼식도 출산 장면도 폭풍으로 인한 죽음까지도 그려져서인 듯하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며 떠나고 집에는 나와 장례식에서 돌아올 가족의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오틸리만 남았다. 가족에게 오래전 일어났던 가슴 아픈 사건이자 다 끝난 과거이며 “순전히 자기방어를 위해” 잊어버린 존재인 그녀는 장례 행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몫을 하며 이 집에서 지내게 돼 있으니까. 이제 한 사람의 숙박객에 불과한 나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틸리는 “여느 모든 타인과 마찬가지로 내 힘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 있는데.

서두에 좀 길게 보여준다 싶었던 낡은 마차와 조랑말이 결말에 다시 쓰인다. 각자의 집에서,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서 차별받는 타자들이었던 두 여성은 손에 고삐를 잡고 우스꽝스럽게 비틀거리며 장례 행렬을 따라 나아갔다. 그렇게 나의 휴가는 변주된다. 처음엔 나 자신만을 위한 휴가였다가 오늘만은 오틸리와 함께 하는 휴가로. “햇볕의 열기, 환한 공기, 공작빛 녹색으로 물든 하늘. 이것들 중에서 무언가가 그녀에게 가 닿은 것 같았”고 오틸리는 울음 같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그들은 장례식에 갔던 가족이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잘 아는 오솔길을 통해 집으로 먼저 돌아와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그 탈출 같은 짧은 휴가를 응원하는 마음이 독자에게도 눈물처럼 솟구치며 동시에 내 힘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 있지만, 그 거리를 부정하고 다리를 놓고 싶은, 놓아야 하는 타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조경란 소설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신민아 '순백의 여신'
  • 신민아 '순백의 여신'
  • 차주영 '시크한 매력'
  • 수지 '청순 대명사'
  • 에스파 윈터 '완벽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