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전장 북한군 투입 효용성 확인
아·태 공략 위해 ‘최적 파트너’ 판단
“우크라 종전 협상 北과 협력” 밝혀
안보 외 의학 등 다방면 교류 확대
속셈은 역내 영향력 확대
러, 서방 중심 맞서 다극 질서 꾀해
전장 우위 위해선 北 군사 지원 필요
北 입장에선 첨단기술 확보 등 이점
대북제재 우회, 체제 유지에도 도움
韓, 외교관계 ‘오리알’ 신세 피하려면
트럼프, 연일 김정은에 우호 메시지
동북아내 한국 입지 줄어들 가능성
北·美 가교 역할 러에 빼앗길 수도
전문가 “대러관계 점진적 회복 필요”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가 북한을 대하는 모습은 외교가의 당초 예상과 동떨어진 면이 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북·러관계는 이완될 것이란 전망이 국내에선 우세했다. 러시아가 더 이상 북한의 군사적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제재 해제를 위해 서방과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이란 논리에서였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가 북한을 향해 발신하는 메시지들을 살펴보면 양국관계는 더욱 긴밀해지는 양상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과 관련해 북한과 협력하겠다고 공개 언급한 게 대표적이다. 전쟁 종식 이후에도 북·러 밀월관계는 계속될 것이란 시그널로 해석됐다. 현재 북한과 러시아는 군사협력을 넘어 과학·교육·보건 등 다방면에서 전방위적으로 밀착하는 중이다.

푸틴 대통령이 전후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데 북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수준으로 유럽과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운 러시아 입장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우호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하고 있어 자칫 잘못하면 동북아에서 한국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걸며 북·미관계의 창구로 기능한 한국의 역할을 러시아가 대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쟁 승리 넘어 다극질서 꿈꾸는 푸틴
푸틴 대통령의 목표가 우크라이나 전쟁 승리를 넘어 옛 소련의 영광을 되찾는 데 있다는 진단은 꾸준히 나왔다. 미국 국가정보국장실(ODNI)은 지난달 25일 공개한 ‘연례 위협 평가’(ATA)에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 세계사, 개인적 유산에서 결정적인 시기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현승수 통일연구원 부원장은 이와 관련해 1월 발간된 ‘러시아의 대외 전략과 한반도’ 연구총서에서 “러시아는 탈냉전기 30년 동안 미국이 주도해 온 단극적 세계 질서에 종말을 고하고, 이를 다극적 세계질서로 교체하겠다는 지상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 부원장은 러시아가 꿈꾸는 다극 세계에 대해 “여러 개의 지역 대국이 각자의 세력권을 인정받는 세계질서”라며 “그 안에서 러시아도 하나의 극으로서 위상을 인정받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단순한 추측성 평가라고 볼 수 없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20여년간 직접 그렇게 선언해 왔다. 푸틴 대통령은 소련 해체가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2005년 4월 의회 연설)이고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이를 뒤집고 싶다(2018년 3월 미디어 포럼)는 인식을 공개적으로 표출해 왔다.
2007년 뮌헨안보회의에선 서방 주도의 국제질서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당시 서방 지도자들의 면전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동진 등을 비판하며 “단극체제는 오늘날 세계에서 용납될 수 없고 실현 불가능하다”고 연설한 바 있다. 2014년 크름반도 합병과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 대통령의 이러한 구상이 실행에 옮겨진 결과로 평가됐다.

◆“러, 종전 이후 北에게 얻을 이익 많아”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격전지였던 쿠르스크 지역에서 북한군의 도움을 받아 승기를 잡으며 북한의 효용성을 확인했고, 전후에도 양자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외교·안보·경제적 이익이 많다고 분석하고 있다.
제성훈 한국외대 교수(러시아학)는 “유라시아 서부에서 나토의 확장에 맞서고 있는 러시아는 안보적으로 취약한 극동 지역에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응하기 위한 파트너가 필요하다”며 “특히 볼셰비키혁명 이후 1917∼1922년 내전 동안 서방 군대가 극동 지역에 진주한 전례가 있어 러시아는 이를 더욱 다급하게 느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도 러시아는 당분간 북한의 재래식 무기 등 군사적 지원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종전 협상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선 전장에서 우위를 유지할 필요가 있고, 혹시 모를 장기전에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부상으로 지경학의 무게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과의 관계가 경제적으로도 러시아에 이익이 된다는 시각도 있다. 이상준 국민대 교수(유라시아학)는 “전쟁이 끝나더라도 유럽에 에너지를 수출하는 러시아의 공급망은 당분간 단절되거나 축소될 수밖에 없어 러시아에게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졌다”며 “북한에 관련 인프라를 구축해 놓으면 향후 해양세력이 이를 이용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또 “현재 러시아의 극동 지역 항만이 완전히 포화 상태인데 이를 개발하고 현대화하려면 수조의 돈이 들어간다”며 “중국 등에 철강, 석탄 등 물량을 수출하기 위해 북한의 나진·청진항을 사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북·러관계는 자신의 평판, 위신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푸틴 대통령은 다극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으로 인도 등 ‘글로벌 사우스’(북반구 저위도 및 남반구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와 유대 관계를 강화하고 있는데, 서구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협약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 국가에 신뢰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北에겐 제재 회피 수단… 다방면서 이익
북한의 경우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보다 확실하다. 북한이 자력으로 단기간에 개발하기 힘든 군사위성,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재진입, 핵추진 항공모함 등의 첨단 군사기술을 러시아로부터 이전받을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안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우크라이나 일간 키이우포스트는 14일 새뮤얼 퍼파로 미국 인도태평양사령관이 최근 미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이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포탄 수십만발 제공의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지대공미사일(SAM) 등 첨단 방공장비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북한은 대북 제재를 우회해 러시아로부터 에너지와 식량 등을 확보하며 체제를 공고히 유지하는 데 도움 받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의 역점사업인 외국인 관광객 유치, 종합병원에 들어갈 첨단 의료장비 확보 등에서도 이익을 취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북·러는 김일성종합대학교 사무소를 시베리아의 과학기지에 설립하고, 북한 의사들이 모스크바 의학 기관에서 실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다방면의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동북아 ‘상수’될 북·러… 韓 입지 우려
북·러관계가 동북아에서 ‘상수’가 된 상황에서 북·미 간 북핵 협상이 재개된다면 한국은 ‘패싱’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관계를 회복한 후 김 위원장의 뒷배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방북해 김 위원장과 체결한 북·러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조약에 그 근거가 담겨 있다. 조약 5조는 “서로의 핵심 이익을 침해하는 협정을 제3국과 체결하지 않으며 그러한 행동들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미 대화의 의제를 두고 북·러 간 논의가 진행될 수 있는 셈이다.
이와 달리 남북관계는 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선언 이후 전무한 상태다. 향후 북·미 대화 재개 시 ‘코리아 패싱’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국과 전방위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우선하되, 한·러관계의 점진적 복원을 통한 북·러관계의 약화를 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장세호 연구위원과 이기동 수석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전략보고에서 “북·러의 양국 간 협력을 통한 기대 이익의 범위를 고려할 때 양자관계가 단기·전술적 차원에 그치기보다는 장기·전략적 차원에서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며 “러시아의 한·러관계 내 기대 이익을 적극 부각해 정책 방향 조정을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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