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다 산 것 같은 아이들…받아쓰기 하나만 틀려도 스트레스”
유·초·중·고 사교육비 32조…“공교육 정상화 위한 대개혁 필요”

초등학교 입학 전 유명 영어학원에 다니기 위한 입학시험을 일컫는, 이른바 ‘7세 고시’가 유행할 정도로 영유아기 사교육이 과열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7세 고시를 심각한 ‘아동 학대’로 규정해 달라는 진정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접수됐다.
국민 1000명으로 구성된 ‘아동 학대 7세 고시 국민 고발단’은 16일 서울 종로구 인권위 앞에서 ‘아동 학대 7세 고시 폐지’ 기자회견을 열고 교육 당국의 강력한 제재와 영유아 사교육에 대한 전면적인 실태조사를 촉구했다.
고발단은 “영어학원 입학을 위한 시험이란 명목으로 만 6세 아이들이 영어 문장을 외우고 인터뷰를 준비한다”며 “인권위는 7세 고시가 아동 학대 이상의 심각한 범죄행위라고 규정하고 교육 당국이 강력히 제재하도록 조치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초등학교 4학년 정세연(10)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입장문을 쥐고선 “오늘도 친구들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지만 가방 안에는 교과서가 아니라 학원 숙제 책만 가득하다”며 “친구들을 학원에서 구출해 달라”고 호소했다.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입학 전 자녀들에게 ‘고시’를 치르게 하는 이유는 초등 저학년 때까지 아이의 영어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명문초 → 초등 의대반 → 영재입시반’으로 이어지는 입시 코스의 출발점이 된 7세 고시에 이어 최근엔 유명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한 시험인 ‘4세 고시’까지 등장했다. 사교육 업계는 학부모들의 불안을 부추기는 마케팅으로 ‘N세 고시’ 시장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
교육부의 2024년 사교육비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유·초·중·고 사교육비는 총 32조5000억원에 달했다. 이 중 영유아 대상 교육비로만 연간 3조원이 쓰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번 조사에 어린이집 특별활동이나 유치원 방과 후 프로그램 등에 대한 비용은 포함되지 않아 전수조사 시 실제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박영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은 “이미 대만은 만 5세 이하 유아를 대상으로 영어 사교육을 금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에 내맡긴 채 책임 있는 조치 없이 방관만 해왔다”며 “사회경제적 불평등, 양극화로 인한 입시경쟁 교육의 불길이 유아들에게까지 번지며 사회 비극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영유아 사교육의 시작 연령은 낮아지고 비용은 증가하는 추세지만, 영유아 시기 사교육의 효과가 유의미하지 않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국책연구기관인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영유아기 사교육 경험과 발달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영유아기 사교육 경험은 장기적으로도 학업 수행 능력에 효과가 없거나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아 존중감과 삶의 만족도 등 사회 정서적 측면에서는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이 관찰됐다.

초등학교에서 27년간 근무한 정모 교사는 “1학년 학생 한 명이 받아쓰기 시험을 잘 못 봤다고 집에 가서 엄마랑 싸워야 할 일이 걱정된다며 마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고민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며 “요즘 아이들은 받아쓰기 하나만 틀려도 몰래 정답을 고칠 만큼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전했다.
고발단은 오는 6·3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에게 극단적인 선행학습 경쟁을 부추기는 사교육 환경을 철폐하고 공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는 ‘교육 대개혁’을 주문했다.
조국혁신당 강경숙 의원은 “아이들이 하늘을 보고 숨 쉬며 친구들, 부모와 함께 놀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차기 정부의 핵심 과제”라며 “정부와 교육 당국이 이제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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