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후 대전 중구 은행동 옛 대전부청사 3층 대강당. 88년 전 처음 지어질 당시 날것의 모습 그대로, 텅 빈 공간이 시민들을 맞았다.
바둑판 모양의 격자 형태로 끝이 곡선으로 말려있는 ‘궁륭형 우물반자’ 천장은 세월의 더께로 찢겨 콘크리트가 노출돼있었다. 양쪽 벽엔 커튼월방식의 통창이 일렬로 나란히 나있다. 창문 아래의 가는 선은 당시 바닥이 평면이 아니라 기울어져있음을 알 수 있게한다. 1937년 부청사 건축 당시 이곳은 공회당(대집회장)으로 쓰였다.


대전의 첫 청사건물로 지역 대표 근대건축물인 옛 대전부청사가 52년 만에 베일을 벗었다. 대전시는 이날 원형복원사업 현장을 시민에 공개했다. 지난해 12월 내부 해체 공사에 들어간 지 4개월 만이다.
시는 이번 해체 공사를 하면서 88년 전 건축 당시의 기둥과 보, 벽체 등의 구조부재는 물론 원형창의 위치, 천장 몰딩 등 장식적인 부분도 거의 원형 보존된 것을 확인했다.

내부 해체 공사로 과거의 자태를 드러낸 부청사는 과감하고 혁신적이었다.
부청사 정문 방향이나 옥상 설계 등을 보면 당시의 건물 조성 형태와는 다른 특이점이 있다. 부청사 입구는 남향이 아닌 북향이었는데 입구를 도로쪽에 내야했기에 일반적인 출입구 방향과 다른 것이다. 그때만해도 허허벌판이었던 대전은 도시 건설을 시작하며 부(府)의 기틀을 갖춘다. 도로와 건물 등 도시계획은 1942년이 완공 목표이었는데 부청사 건물은 이보다 5년 앞서 지어졌다.

건물 옥상은 개방해 정원과 전망대로 쓰였다. 옥상의 시선은 시내 쪽이 아닌 시내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마도 보문산을 바라보기 위해 반대방향을 트여놓은 것으로 시는 추측하고 있다. 계단형으로 설계된 옥상은 전망대이자 쉼터였다. 시는 원형복원 후 옥상을 정원으로 꾸민다는 구상이다.
당시 대전시내 가장 높은 건물이자 최첨단 스마트한 근대미를 강조하는 건물로 화제를 모았다. 설계자는 조선총독부 기사로 옛 충남도청사(현 대전근현대사전시관)를 그려낸 일본인 사사 게이치다.
고윤수 대전시 유산관리팀장은 “대전부청사는 최초의 도시계획으로 결정된 공공건축물로, 활기찬 대전시내에 문화 건축미를 내뿜으며 당당하게 서있다”며 “이 건물은 대전은 문화도시로서 발전하고 싶었던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건물은 세월 속에 다양하게 쓰였다.
1942년 대전부청사가 이 건물로 이주해 전체 건물을 다 쓴다. 1·2층은 행정시설, 3층은 공회당이었다. 공회당은 1300여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1949년 지방자치법이 바뀌면서 과거에 부라고 썼던 이름을 다 시청으로 갈았다. 대전부청사도 이때 대전시청사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청정으로 쓰였고 이후 충남상공장려관, 대전청소년회관, 대전상공회관으로 바뀌었다. 건물 모습도 조금씩 형태를 달리했다. 건물 외관은 1996년 삼성화재가 건물을 매입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됐다.
1972년 사유재산이 된 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부청사는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지역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보존 여론이 일면서 2023년 시는 매입을 결정했고, 52년 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
건축계와 학계에서도 부청사 건축양식의 희소성을 주목하고 있다.
김조윤 건축사(모노그램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부청사 설계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과감하고 진보적”이라며 “특히 홀에 들어섰을 때 맞이하는 빛과 계단의 모습은 굉장히 우아하다. 지금은 헐린 캐노피 복구, 외벽 개방형 계단 등 그 시대의 건축적 가치를 볼 수 있는 형태 복원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시는 최초의 건축도면이 분실돼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문서에서 찾아낸 대구공회당(1931년)과 군산공회당(1934년) 건축도면을 토대로 현재의 구조와 흔적들을 비교 분석해 정밀한 복원사업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시는 보수 공사를 마친 이달 말 본격 복원작업에 돌입한다. 시는 부청사를 2026년까지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시킬 계획이다.
고 팀장은 “부청사 복원이 완료되면 대전의 랜드마크이자 지역사를 대표하는, 대전을 가장 잘 설명하는 근대문화유산이 될 것”이라고 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