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혐오감 이유로 죽거나 터전 잃어
백로는 악취 심해 서식지서 쫓겨나기도
인간종 편향·빈약한 윤리의식 드러나
지극한 돌봄 받는 많은 반려동물들도
사실은 본성 억눌린 채 폭력당하는 것
인간·동물 공존 위한 섬세한 논의 시작을
도시의 동물들- 동물과 함께 살기 위해 시작해야 할 이야기들/최태규/이지양 사진/사계절/2만4000원
1970년대 독재정권이 벌인 ‘전국 쥐잡기 운동’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라’, ‘사회를 좀먹는 존재는 박멸해야 한다’고 선전(프로파간다)하기에 적절한 이벤트였다. 죽어가는 동물의 고통 따위는 고려하지 않던 시대라 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무분별하게 사용한 쥐약 때문에 여우를 비롯해 여러 종의 포식동물이 남한에서 사실상 절멸하고 말았다.

1980~90년대에는 정력에 좋다면 무엇이든 잡아먹는 ‘보신 열풍’이 불었다. 곰, 여우, 늑대, 너구리, 고라니, 오소리, 까마귀 등 온갖 동물을 잡아먹는 통에 상당수의 종이 멸종하거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었다. 인간은 늘 야생동물을 잡아먹고 살아왔지만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사고파는 시대에 접어들자, 야생동물을 사고파는 ‘산업’이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책은 ‘동물의 삶과 죽음, 번성과 절멸을 통해 본 한국 현대사’라는 부제를 붙여줄 만하다. 저자가 소개하는 동물들의 삶에는 급속한 산업화와 군사독재, 반(反)생태적 개발주의, 시장의 지배, 소비자 정체성과 개인 미디어를 갖춘 시민들의 등장이라는 한국 사회의 격렬한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멧돼지와 인간, 둘 중 누가 가해자일까. 도시가 인간의 영역이라고 굳게 믿는 이들은 사람을 피해자로, 멧돼지를 가해자로 규정한다. 현대인들은 동물을 그저 먹거리로 취급하거나 귀여움의 대상으로 가두어 기르는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특히 도시의 삶은 인간이 동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고, 통제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가끔 도심에 출현한 멧돼지는 이 같은 굳건한 믿음에 균열을 내곤 한다. 호랑이와 표범, 늑대를 절멸시킨 탓에 멧돼지가 늘어 문제가 되었는데, 다음 순서로 멧돼지를 절멸시킨다면 우리는 그다음, 또 그다음에 누군가를 박멸해야 하는 상황을 만날 것이다.
여전히 많은 동물이 인간에 의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는다. 길조였다가 유해 야생동물로 전락한 까치, 갑자기 개체 수가 늘어났을 뿐 인간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 먹이를 찾으러 왔다가 번쩍이는 네온사인에 길을 잃어 민가에 들이닥치기도 하는 멧돼지는 ‘너무 많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한다.


길고양이 안락사는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야생동물은 대량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때는 마을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했던 백로는 깃털이 날리고 냄새가 난다고 서식지에서 쫓겨나며, 연간 20만마리가 사냥이나 교통사고로 죽는 고라니는 멍청하게 차를 피하지 못한다고 조롱을 당한다.
저자는 인간의 불편함이나 혐오감을 이유로 동물을 무심히 죽이거나 쫓아내는 여러 장면을 통해 우리의 종 편향과 빈약한 윤리, 부족한 생태적 관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나아가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지극한 돌봄을 받는 동물들도 사실은 실내에 갇힌 채 본성을 억누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디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행처럼 사용되는 ‘돌봄’이라는 말이 내포한 폭력과 동물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해온 사람들에 대한 멸시에 대해서도 성찰해보자고 제안한다. 권리, 자유, 해방, 돌봄과 같은 개념들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를 옮기고 식당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멧돼지를 그냥 내버려두란 말인가’, ‘병들거나 버려진 동물에겐 모두 안락사를 허용하자는 말인가’, ‘공장식 축산을 옹호하는 것인가’라며 반감을 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 같은 질문들에 단 하나의 답을 내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거나 ‘다 잡아서 죽여야 한다’는 식의 둔탁한 주장을 넘어 각 동물이 처한 상황과 생태적, 사회적, 정서적 파장을 고려한 신중하고 섬세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뜻에서 쓰였다.
진정 동물을 위하고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논의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마음먹는 일이다. 내가 키우는 개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육류나 가죽 제품을 덜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의 왜곡된 동물 사랑에 제동을 걸면서 동물의 입장에서, 동물을 주어로 삼아 대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뜨겁고 치열한 공론장 구실을 한다.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야생동물구조센터다. 한국 사회는 이제 가축종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간섭 없이 살아가는 야생동물의 조난에도 개입한다. 차에 치인 고라니, 전염병에 걸린 너구리, 날개 다친 독수리를 치료하고 돌보는 일에 세금을 쓰기로 했고, 그 일을 하는 곳이 바로 야생동물구조센터다. 치료한다고 해서 당장 이익을 보는 사람도 없고, 생태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에도 역부족이지만 그 일이 필요하고 의미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