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이하 ‘폭싹’) 7화. 서울대에 진학한 딸 ‘금명’(아이유)이 보고 싶어 약속도 않고 캠퍼스로 무작정 찾아간 제주 섬놈 ‘관식’(박해준). 기숙사 앞 버스정류장에 앉아 하염없이 딸을 기다린다. 중천에 떴던 해는 져버린 지 오래고, 험난한 하루를 보낸 후 밤늦게 버스에서 내린 금명은 아빠를 타박한다. “아빠 땜에 못살아.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관식이 맨 크로스백의 꼬인 끈을 고쳐주며 금명은 계속 핀잔한다. “불편하지도 않아? 왜 맨날 이러고 다녀!” 그래도 관식은 괜찮다. 딸의 얼굴을 봤으니 됐다는 듯 웃는다.

중년 관식을 한층 짠해보이게 만든 이 크로스백 끈엔 비밀이 숨어 있다.
“아빠(관식) 가방 끈이 꼬인 게 잘 보여야 한다는 김원석 감독님의 디렉팅이 있었어요. (DI 작업으로) 끈 부분만 밝히거나 샤픈을 넣어 잘 보이도록 했죠.”(김일광 덱스터스튜디오 DI본부 DI 2실장)
김일광 실장은 컬러리스트다. 붓으로 종이에 색을 칠하듯, 디지털 색보정 전문 시스템(베이스라이트)으로 화면에 밝고, 어둡고, 차갑고, 따뜻한 색을 입힌다. RGB(적·녹·청)값과 채도, 콘트라스트를 조절하는 그의 손을 통해 영상은 천지차이가 된다.
그를 만난 곳은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덱스터스튜디오 작업실. 영사기와 스크린이 설치된 ‘작은 상영관’같은 공간에 앉아 몇 시간이고 영상과 마주한다. 이 손끝을 통해 ‘폭싹 속았수다’와 ‘무빙’ 등 OTT 히트작과 영화 ‘7번방의 선물’, ‘변호인’, ‘터널’, ‘황해’, ‘더 문’, ‘대도시의 사랑법’ 등이 고유의 색을 입었다.
“촬영된 영상을 가지고 작품의 주제를 제일 잘 표현하기 위한 톤을 만드는 일이죠.” 그는 컬러리스트가 하는 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처음 만나는 영상 ‘원료’들은 이질적이다. 예를 들어, ‘폭싹’에서 청년 ‘관식’(박보검)이 배에서 뛰어려 ‘애순’을 만나기 위해 헤엄치는 장면은 로케이션 3곳에서 나뉘어 촬영됐다. 촬영 회차마다, 카메라마다 날씨도 계절도 가지각색이다. ‘튀는’ 화면들을 비슷한 톤으로 정리하고, 연출자가 원하는 분위기를 창조하는 일이 그의 업이다.
‘폭싹’의 톤을 정립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3년 전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 읽었어요.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대의 폭이 워낙 넓은데, 극이 시간 순으로 쭉 진행되지도 않고 장소와 시간대가 계속 바뀌니 (톤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죠.”
단번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 건 아니다. “촬영감독님(최윤만)과 여러 톤을 테스트해 봤는데, (김원석) 감독님은 ‘이런 느낌이 아니다’라고 하시더군요. 노란 느낌이 아예 안 보이는 청량함을 원하셨어요. 과거를 그릴 땐 흔히 채도가 빠진 앰버 톤을 쓰는데, 감독님은 과거 부분이 오히려 더 컬러풀하기를 원하셨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폭싹 속았수다’ 속 청량한 블루 톤의 화면이다. 전체적으로 파란 색감을 유지하되 장소와 시대, 계절별로 따뜻함과 차가움을 변주하며 그 안에서 각각 다른 색들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도록 작업했다. 주인공 부부에게 비극이 닥치는 2막 ‘여름’은 더운 느낌의 여름이 아닌 서슬 퍼런 푸름이 감도는 풍경으로 묘사됐다.

‘디테일에 강한 연출’이라는 평가를 듣는 김원석 감독과 ‘한 끗 차이’를 위한 섬세한 작업에도 공을 들였다. 시청자의 눈에 잘 담겨야 할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정교한 수공예품을 만들듯 장면별로 터치했다. 중년 관식(박해준)의 꼬인 가방끈과 거친 손, 청년 ‘관식’(박보검)과 ‘애순’(아이유)의 상기된 뺨이 유독 도드라져 보인 것도 이런 노력 덕분이다.
“보통 DI 작업은 전반적인 톤 위주로 체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업에서는 인물의 감정에 따라 컬러그레이딩의 신경을 많이 썼어요. 김원석 감독님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명료한 주문을 하셨기 때문이죠. 관식과 애순의 여관 장면의 경우, ‘두 주인공이 특정 대사를 한 후 감정이 고조되니 홍조를 색보정으로 만들자’ 하는 식이었죠.”
김 실장에게 ‘폭싹’은 ‘예쁜 자식’같은 작업물이다. “제가 참여한 작품은 모두 자식 같지만, 내 눈에도 예쁜 애가 밖에 나가서 남들한테 칭찬까지 받으면 기분이 정말 좋잖아요. ‘폭싹’은 그런 경우에요. 모든 면이 예쁘게 잘 나온 작품인데 다들 좋아해 주시니까 기분이 정말 좋죠.”
2003년 아날로그 색보정으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영화와 시리즈를 통틀어 한 해에만 약 10건의 작품을 맡는다. 영화 촬영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전환하고, 글로벌 OTT가 국내 장악력을 높이는 매체 환경의 격량 속에서도 굳건한 현역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아티스트’로 여기지는 않는다며 겸손을 표했다.


“저는 감독이 구현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조력하는 사람이에요. 아티스트는 아니죠. 같은 맥락에서, 가장 좋은 색보정이란 감독이 생각하는 룩을 잘 구현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컬러리스트가 작업을 하다보면 눈에 띄는 색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처음보는 색, 화려한 색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전체 이야기를 잘 전달해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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