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처럼 네모난 밭에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하나 둘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새싹보다는 흙이 더 많이 보인다. 매년 이맘 때면 그랬듯이 올해도 머지않아 이 밭은 초록색으로 뒤덮일 것이다. 지난해 겨울을 무사히 보낸 자식같은 새싹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4월 18일 만난 박주호 안젤라 농원 대표다. “고맙지요. 사람도 견디기 힘든 추위를 이겨내고 싹이 트고 있잖아요” 박 대표는 9년 전 귀농하면서 심은 산양삼 밭에서 한없는 감사의 말을 되뇌였다.

박 대표는 30년간 약초를 연구해온 전문가다. 그는 직장인 기아자동차 약초 동아리에서 회원들과 함께 매주 약초를 캐러 산에 다녔다. 전남 완도가 고향인 박 대표는 “그냥 산이 좋아서 다니다 보니 약초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퇴직하면 약초를 재배하기로 했어요” 박 대표의 인생 2막은 오래 전부터 약초 재배로 정해졌다. 그는 퇴직 5년 전부터 약초를 재배할 산을 알아보고 다녔다. 생활정보지에 매물이 나오면 약초 재배가 적합한 땅인지 직접 발로 뛰어다녔다. 그러던 중 2016년 6월 전남 장성 북이면 오월리 야산이 마음에 들었다. 약초 재배지의 조건은 산의 방향이 동북향이고 그늘이 있어야 한다. 양지 바르면 안된다. 또 하나의 조건은 토양이다. 물 빠짐이 좋은 마사토와 자갈이 좀 있는 땅이 산양삼 재배에 적합한 토질이다. 산양삼 재배에 박 대표는 이런 조건에 딱 맞은 임야 1만 2000평을 샀다.
이 때부터 박 대표의 인생 2막이 시작됐다. 하지만 산을 개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날마다 아내와 함께 톱과 삽으로 나무를 베고 땅을 골랐어요” 박 대표는 나무와 돌을 옮기면서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이런 산을 밭으로 만드는 개간작업은 2년간 계속됐다.

2017년 봄, 박 대표는 어느 정도 개간이 된 4000여평에 산양삼 10만 뿌리를 심었다. 매년 산양삼 재배 면적을 늘려갔다. 지금은 산양삼 밭이 1만평이 넘는다.
그가 산양삼을 심은 데는 고소득 작물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산양삼은 단위면적당 소득이 높아요. 많은 땅이 필요하지 않아요” 박 대표의 산양삼 밭은 200∼300평 규모로 여러군데 조성됐다. 그리 넓지 않다. 산양삼은 뿌리당 보통 2만∼3만으로 판매할 정도로 비싼 편이다.
박 대표는 3년 전 어느 여름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귀농후 처음으로 심었던 산양삼을 수확한 날이다. 그는 산양삼을 판매해 2000만원가량을 손에 쥐었다. “기뻤죠. 고생한 결실이죠” 그는 소득작물로 산양삼의 가능성을 엿봤다.

그는 자신의 밭에 산양삼을 심기 전에 약초회원 10여명과 인근 야산에서 시험재배를 했다. 4000여평을 임대해 기후나 토양, 습도 등을 단지별로 비교하면서 어느 조건일 때 가장 잘 자라는지 시험했다. 여기서 얻은 데이터로 본격적인 재배를 해 실패의 가능성을 줄였다. 그의 시험재배는 수확의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그는 산양삼 재배 4년째에 이유없이 고사하는 산양삼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식재 후3∼4년이 되니 말라죽어 갔어요” 그는 왜 고사하는지 원인 파악에 나섰다. 고사의 원인은 과습이었다. 산양삼을 심은 땅에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이면 습도가 높아지면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 박 대표는 이런 땅에는 산양삼 대신에 명이 나물 등 산나물을 심었다. “땅의 성질이 바뀌지 않으니 산양삼을 심을 수는 없죠” 박 대표는 산양삼에 맞지 않는 토질에 굳이 산양삼을 심지 않는다.
그는 산양삼을 키우면서 농약을 하지 않는다. “몸에 좋은 약초를 재배하면서 몸에 해로운 농약을 뿌리면 안되지 않나요” 농약을 치지 않으면 풀과의 전쟁을 해야 한다. 제초제를 뿌리면 일손을 덜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산양삼을 둘러싸고 있는 잡초를 손으로 모두 뽑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아는 가족과 지인들이 산양삼을 먹기때문이다.

산양삼 판매는 그만의 전략이 있다. “핸드폰에 저장된 지인들에게 문자를 먼저 보내요” 그는 수확철인 5월이 되기 전에 ‘5월부터 산양삼을 수확합니다. 주문을 받습니다’ 이런 내용의 문자를 발송한다. 문자뿐만 아니다. 성당과 학연, 지연, 혈연을 총동원해 산양삼을 홍보한다. 이런 홍보 덕분인지 아직까지 산양삼을 팔지못해 발을 동동구른 적은 없다.
치밀하게 준비해 귀농했던 박 대표가 예비 귀농인들에게 당부하는 한마디는 ‘치밀한 계획’이었다. “준비를 아무리 잘해도 정착하기 힘든 게 귀농이죠” 그는 퇴직 전에 귀농하면 어떤 작물을 재배할 것인지부터 미리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준비와 계획만 잘해도 귀농은 절반의 성공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귀농하면 일단 원주민들과 갈등이 있으면 안된다고 그는 당부했다. 귀농 후 그의 차에는 항상 막걸리와 과자, 음료수가 실려있다. 마을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막걸리를 건넨다고 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을 담아 드리면 무척이나 좋아해요” 한 두번 이렇게 얼굴을 익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이 돼 간다고 했다. 박 대표는 마을봉사하는데 항상 1등이다. 마을 일이라면 발벗고 나선다. “외지인 티를 내면 안되잖아요” 그는 원주민 속에 들어가려면 나 자신을 내려놓고 그들과 항상 호흡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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