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아파트 84㎡(전용)는 올해 공시가격 기준 약 5억원. 김모(76)씨는 이 집에서 25년째 홀로 살고 있다. 자식들은 분가했고, 연금은 월 60만 원 남짓으로 매달 나가는 관리비와 생활비는 90만원을 훌쩍 넘긴다. 그는 “집을 팔자니 갈 곳이 없고, 집을 유지하자니 생활비가 빠듯하다”라며 “팔고 싶어도 무섭고 막막하다”라고 말했다.
21일 하나금융그룹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60세 이상 고령층의 자산 중 약 85%가 부동산에 편중돼 있다. 금융자산은 부족한 반면, 아파트 한 채가 곧 ‘노후 자산’이 된 셈이다.
문제는 이 구조가 ‘현금 없는 부자’를 양산한다는 점이다. 은퇴 이후 수입은 줄지만, 집을 유지해야 하니 유동성이 떨어진다. 의료비나 돌발 생활비가 생기면 당장 쓸 돈이 없다.
이런 구조적 모순을 풀 대안으로 주택 ‘다운사이징’이 주목받는다.
크고 비싼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옮기면, 거주비 부담을 줄이고 남은 자산을 생활비나 의료비, 혹은 연금 계좌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주는 이미 2018년부터 이 제도를 제도권 안에 도입했다.
집을 매도한 55세 이상 고령자가 그 자금을 연금계좌로 이전할 경우, 최대 30만 호주달러(약 2억6000만원)까지 세제 혜택을 제공한다.
영국, 뉴질랜드 등도 유사한 제도를 시행하며 고령자의 ‘유동성 있는 노후’를 정책적으로 설계한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다.
다운사이징 후 연금계좌에 넣어야 세제 혜택이 적용되는데, 1억 원까지만 이연 과세 대상이고, 이마저도 고령층 인지도가 낮다.
더 큰 문제는 현실성이다.
한국의 고령층이 선호할 저층·소형·엘리베이터 있는 주택은 공급이 부족하고 이사할 집을 알아보느러 다닐 정신적·육체적 체력 또한 낮다.
또한 고령자 입장에선 낯선 동네로의 이사는 사회적 고립이나 건강 악화로 이어질 수 있어, 이사 자체가 ‘리스크’다.
전문가들은 ‘팔아도 갈 곳 없는 다운사이징’이 되지 않기 위해, 고령자 맞춤형 주거 매물 확충과 함께 이사·입주 연계형 금융상품, 공공임대 연계형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주택연금, 전환형 보증금 제도 등과 연계해 고령층이 자산을 유동화하되 주거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 설계도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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