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국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화려하고 경쾌한 여행 복장을 한 관광객들은 콰이강의 다리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면서 웃고, 떠들고, 시시덕거린다. 건강한 몸으로 살아서 맛있는 것 배불리 먹으면서 외국 여행길에 오른 저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또 가슴이 저려온다. 못나고도 무능한 민족주의적 감상 때문인가.
나는 관광객이 아니다. 괜히 심각한 척한다고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광복 60년이라는 생각을 곱씹으면서 콰이강 다리를 보는 순간 1998년 1월 12일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날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일본을 방문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는 지난날 일본군이 영국군 전쟁포로에게 저지른 가혹행위를 공식 사과했다. 그런데 왜 일본 정부는 그 영국군 포로들과 함께 콰이강 다리 공사에서 희생된 한국 청년들과 한국 정부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가?
나는 그 콰이강의 다리 공사에 끌려 나왔다가 전범이란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었던 홍종묵씨의 기구한 삶을 통하여 일본과 한국의 참모습을 확인하려 한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는 한국 현대사 슬픔의 한 편린을 껴안으려 한다. 그러기 위해 1942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2년 동남아 일대를 장악한 일본군은 연합군 잠수함과 전투기 공격으로부터 그들 점령지를 사수하기 위한 보급로 확보가 위급해졌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콕항구에서 미얀마 모울메인을 잇는 보급로였다. 두 지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철도뿐이었다. 가장 난공사가 예측되는 곳은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를 이루면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쾌노이강(Mae Nam Khwae Noi, 콰이 Khwai)을 건너는 다리 공사였다.
절박한 사태 해결을 책임진 남양군사령부는 극비리에 공사 준비를 서둘렀다. 철도공사를 맡을 노동력은 태평양전투에서 체포한 수천 명의 연합군포로들을 강제 동원하고, 부족한 인원은 현지 원주민들을 적당한 구실로 속여 끌어다 쓰기로 했다. 전문기술자는 일본군 공병대와 일본 국내 민간업자를 긴급 동원하고, 철로와 건설자재 대부분은 현지나 중국에서 수탈해 오기로 했다. 그래도 문제가 남았다. 그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를 두고 일본군사령부는 다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철도공사에 동원한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임무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였다. 포로들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러자면 포로들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포로들을 다그치고 매질하는 등 폭력을 써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군이 이 같은 일을 맡는 것은 유익하지 않았다. 연합군과의 전투가 워낙 광범위한 전선에 걸쳐 치열하게 계속되었기 때문에 전투병력을 철도공사 현장의 포로 감시 임무로 전환시킬 여력이 없다는 것도 이유였다. 포로들은 비무장 상태여서 비정규군에서 인력을 동원하기로 한다.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할 순종성이 높은 소모품 인간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지를 놓고 묘수를 찾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을 수행한 과정은 매우 엄격한 체계 아래서였다. 최고통수권 천황→전쟁계획총책임 내각총리대신과 참모총장→작전계획책임 군사령관→전투지휘 사단장과 여단장→단위별 부대지휘 연대장과 대대장→일선지휘 중대장으로 연결되는 철저한 명령체계였다. 철도 건설 공사는 이 같은 일본군 지휘체계와는 별도로 구성된 공병철도연대가 맡도록 했다. 따라서 연합군 포로를 감시할 인원을 동원하는 문제도 정규군 징병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전쟁계획 총책임자인 내각총리는 한국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에게 긴급명령을 내렸다. 긴급하게 필요한 인원 3000명을 ‘군속’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동원하라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후 한국 청년들을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수없이 끌고갔기 때문에 한국인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고 있어서, 군인이 아닌 ‘군속’이라는 새로운 속임수를 쓰기로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즉각 인원동원 계획을 수립했다. 한국인이란 일본이 필요할 때 전투소모품으로 이용하기 위해 준비해 둔 물건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일반 정규군 징병과는 다른 일정 조건을 갖춘 자여야 한다는 데 주된 관심을 쏟았다. 그 조건이란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특수임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포로들과 어느 정도라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 영어 실력을 갖춘 징병 대상 연령대의 한국 청년 3000명을 과연 한국 안에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별개 문제였다. 조선총독부는 내각총리대신으로부터 명령받은 날짜까지 3000명을 동원하여 부산에 있는 훈련소 노구치(野口)부대까지 도착시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하여 1942년 5월부터 한국의 군마다 5∼10명씩을 강제로 할당하면서 동원 공식 명칭을 ‘군속지원통지서’로 정했다.
정규 군인으로서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후방에서 여러 가지 군사시설을 만들거나 가벼운 경비임무를 맡게 될 것이므로 ‘군속’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라는 지령을 따로 내렸다. 군속이 되겠다고 지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지원통지서’를 보냈느냐는 항의가 반드시 나올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답변도 따라 지령을 내렸다. 군속으로 나가게 되면 매월 50엔씩의 급료를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꼬박꼬박 보내줄 것인데,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천황 폐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당사자의 영어 실력을 높게 평가하여 좋은 자리에 취직시켜준 것과 다름이 없어 그렇게 붙였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설명은 각 군의 일본인 군수들 책임으로 떠맡겨졌다. 조선총독부는 지체없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계산리 695번지에 사는 홍종묵에게 ‘군속지원통지서’가 배달된 것은 1942년 6월 6일이었다. 군속지원통지서에는 홍종묵이란 한국 이름 대신 ‘도쿠야마 미쓰오(德山光雄)’란 일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창씨개명의 강행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통지서만으로 보면 일본 정부가 일본인에게 군속지원통지서를 보낸 것이었다. 일본인인 영동군수 명의로 된 통지서를 받았을 때 홍종묵은 21세였고, 결혼한 지 1년째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참으로 고운 색시 서연향은 첫딸을 낳아 젖살이 곱게 오른 딸과 함께 식민지에서의 위태로운 사랑에 몸을 맡긴 채 여름을 나고 있었다. 홍종묵, 아니 도쿠야마 미쓰오는 2년간의 군속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동안 받아서 모아 둔 급료를 밑천으로 양잠업을 하리라 했다. 그리하여 열 명이나 되는 형제들을 키우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정든 집을 떠났다. 그러고는 1988년 그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서 한국 국적을 상실할 때까지 한번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집 떠난 지 46년이 지나는 동안 그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가 노구치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타이멘철도와 콰이강의 다리 공사 현장이었다. 그 곳에서 포로 감시 임무를 맡았고,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었던 그는 포로들로부터 나쁜 일본놈으로 몰렸다. 일본의 패전 후 그는 포로학대죄로 전범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았다. 필사적 저항으로 무기수가 된 그는 다시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로 옮겨져 수형생활을 했고, 죄수 신분으로 지은 농산물은 6·25 동란 때 미군의 식량으로 사용되어 일본에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 1950년대 후반 가석방되었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무국적자가 되어 노동판을 떠돌며 목숨을 이어오다가 끝내 일본에서 죽었다. 일본 정부는 그를 무국자, 조센징으로 차별했고, 한국 정부는 그를 잊어버렸다. 한국 정부가 잊어버린 것이 어디 홍종묵 그리고 도쿠야마 미쓰오뿐이며, 일본 정부가 차별하다 버린 것이 도쿠야마 미쓰오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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