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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마다 이면합의 의혹… 문책인사 악순환
총성 없는 통상협상 전쟁에서 농업은 언제나 한국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우리 농업은 대외 경쟁력이 처지는 탓에 미국 등 협상 상대국들의 집요한 개방 압력에 시달려왔다. 대내적으로도 정치논리와 국민정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특성 때문에 협상테이블에서 쉽사리 합의점에 도달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이에 따라 농업 관련 협상마다 인사 후폭풍이 몰아치고 이면합의 의혹도 불거졌다.

전 정부 고위 관계자가 취재팀에게 들려준 일화다. 2004년 12월 허상만 당시 농림장관은 쌀 관세화 유예 협상(쌀 재협상) 최종 타결을 위해 미국을 방문해 앤 베너먼 농무장관과 만났다. 베너먼 장관은 한국 측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이용해 쌀 이야기에 앞서 광우병으로 중단됐던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를 요청했다.

허 장관은 의례적인 표현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미국 측은 허 장관의 의도와 상관없이 ‘소고기 수입 재개를 위해 노력하겠다’로 해석했다. 실제 2005년 2월 ‘한미 광우병 전문가 회의’가 열렸고, 미국산 소고기 재개 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도 동일한 일이 되풀이된다. 수입 소고기에서 발견된 뼛조각 문제로 한미 간 소고기 갈등이 불거지자, 미국 측은 대뜸 FTA와 소고기 시장 개방을 연계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는 6차협상이 끝난 뒤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 소고기 시장이 충분히 재개방되지 않으면 FTA는 있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개방 압력의 지렛대가 쌀 재협상에서 FTA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런 일은 협상 테이블에만 있는 게 아니다. 김성훈 상지대 총장은 농림장관 시절 농업 시장 수성 입장을 견지해왔는데, 자신이 번역한 책 때문에 반미주의자로 몰렸다고 한다. 1999년 2월쯤 리처드 피셔 미 국무역대표부(USTR) 부대표는 스티븐 보즈워스 주한 미대사와 함께 김 전 장관을 만나 “(당신이 반미주의자여서) ‘미국 통상정책의 기만성’이라는 책을 집필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김 전 장관은 서가에 꽂혀 있던 원서(James Bovard의 ‘The Fair Trade Fraud’)를 보여주며 “내 번역이 잘못됐느냐?”고 되물었다. 당황한 피셔 부대표 일행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김 총장은 “미국은 때로는 상대방을 반미주의자로 몰아가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농업협상은 어김없이 이면합의 의혹과 그에 따른 인사 칼바람을 동반했다. 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마무리되고 김영삼 대통령은 ‘쌀’ 때문에 총리 2명을 경질했다. 죽어도 쌀 시장은 내주지 않겠다는 호언장담이 ‘허언(虛言)이 되자 청와대는 문민정부 초대 총리인 황인성씨를 희생양으로 삼았고, 후임 총리인 이회창씨도 127일 만에 불명예 퇴진시켰다. 허신행 당시 농림장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은 10년 후에도 되풀이된다. 2002년 한중 마늘협상 이면합의 파문이 일자, 협상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었던 한덕수 청와대 경제수석과 서규용 농림부 차관이 옷을 벗었다.

쌀 재협상이 타결된 2005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은 허상만 농림장관을 경질했고, 국회는 이면합의 의혹에 대해 국정조사까지 벌였다. 협상 중 정부는 ‘쌀 외에 어떠한 다른 협상이나 합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에 쌀 외에 사과, 배 등 과일류의 검역 완화를 약속하는 등 협상 상대국 9개 나라 가운데 중 5개 나라와 이면합의를 했다는 의혹이 협상 타결 후 제기됐던 것. 노 대통령은 허 장관 경질 이유로 “농민들 반발을 달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재정 부담도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정부는 UR 협상 이후 10년간 농가에 102조원을 투입한 데 이어 쌀 재협상 때도 2014년까지 119조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92년 대선의 최대 화두는 목전에 둔 쌀 시장 개방이었다. 모든 후보가 쌀 한 톨도 수입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결과적으로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은 2004년 총선에서도 되풀이된다. 농촌이 지역구인 의원들은 하나같이 쌀 의무수입량을 10년 전 기준인 4%대로 묶겠다고 약속했지만 협상 결과 8% 수입을 막지 못했다.

정치논리가 농심을 멍들게 한 최대 사건은 마늘협상의 배경이 된 세이프가드(긴급고율관세 부과) 발동이 꼽힌다.

2000년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농민 표를 의식해 산자부에 세이프가드 발동 압력을 넣었던 것. 또 협상 타결 후 의무화된 중국산 마늘 1만t의 수입비용 630만달러 가운데 약 3분의 2를 국내 폴리에틸렌과 휴대전화 수출 업계가 부담토록 하는 ‘반시장경제적’ 조치를 했다. 정부는 이 협상으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고 말았다.

특별기획취재팀=주춘렬·김귀수·박은주·김창덕 기자 special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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