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탐사보도]"혈압 낮으니 뛰고 오라?" 황당 임상시험

관련이슈 신약 임상실험의 숨겨진 진실

입력 : 2008-01-24 17:05:27 수정 : 2008-01-24 17:05:2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본지 기자 임상시험 체험르포
프롤로그

취재팀은 탐사보도 ‘신약 임상시험의 숨겨진 진실’ 취재 과정에서 임상시험이 연구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지 생생한 실태가 궁금했다. 피험자로서 시험과정에서 겪는 느낌은 어떤지, 임상시험에 대한 연구원 태도는 어떤지 등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를 위한 취재기법으로 취재팀은 ‘기자 체험’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체험은 병원 측에 미리 알리지 않고 진행했다. 이를 밝힌다면 임상시험 연구 현장을 모습을 그대로 살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취재 대상 병원과 코디네이터(임상시험 참여 연구원) 이름은 철저히 익명으로 처리함으로써 취재윤리 문제를 비켜갔다.

임상시험 체험은 본보 취재팀 우한울(31) 기자가 맡았다. 우 기자는 7월16일 신체검사를 거쳐, 22일부터 24일까지 2박3일 동안 국내 한 제약사가 시행중인 비만 치료제 카피약 임상시험에 참여했다.다음은 임상시험 참여 과정을 기자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기사다.


#1 임상시험센터 ‘입소’ : 7월22일 첫째 날 오후 6시20분

첫날부터 지각이다. 지하 좁은 복도를 지나 A병원 임상시험센터에 황급히 들어섰다. 한 30명쯤 될까. 대학생쯤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의 피험자들이 로비에 콩나물 시루처럼 앉아있었다. 나이 서른 줄 기자는 언뜻 봐도 최고 연장자다. 눈총을 받는 것 같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뭔가를 설명중이던 코디네이터와 눈이 마주쳤다.

“늦으셨네요. 일단 번호부터 드릴게요. B2 쓰시면 되겠네요. 앞으로 계속 쓸 번호니까 기억해야 합니다.” B2…. 번호로 불리는 건 11년 전 군 훈련소 이후 처음이다. 잠자던 ‘노예근성’이 다시 깨는 느낌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센터는 생각보다 ‘비인간적’이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나는 ‘경로우대’를 받았다. 원래 ‘지각생’은 뒷번호에 배정되며 간이침대 신세를 져야하는데, 코디네이터는 앞번호를 준 것이다. 덕분에 침대 방을 쓰게 됐다. 이번 시험에 참여한 피험자 수는 센터 측 수용인원을 5∼6명 웃돌았다.

코디네이터가 번호를 정리하던 사이, ‘투약 기록지’를 엿볼 수 있었다. 기록지에 따르면 코디네이터는 피험자 30명을 A와 B 두 그룹으로 나누게 돼 있었다. 각 그룹은 다시 1~15번까지 번호가 각각 매겨진다. 나는 B2, 그러니까 그룹 B 두 번째 피험자다.

그룹을 둘로 나눈 것은 시험약과 대조약을 따로 투약하고, 결과를 서로 비교하기 위해서다. 기자가 속한 B그룹은 한 국내 제약사에서 만든 카피약을 먹고, A 그룹은 기존 식욕억제 비만치료제를 투약받게 돼 있었다.

이후 연구팀은 각 그룹이 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약은 얼마나 빨리 흡수되는지 등을 조사한다. 이른바 ‘생동성 시험’이라 불리는 이 시험은 두 그룹이 비슷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야만, 카피약이 식품의약품안전청 시판 승인을 받게 된다.



#2 “부작용이 있다고요? 죽으면 어쩌지?” : 오후 7∼오후 10시

번호 배정을 서둘러 끝내고 병원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피험자를 한명 한명 뜯어봤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가는 것이 학교 선후배나 친구 사이로 보였다. 혼자 참여한 환자는 손에 꼽는다. 기자를 포함해 3∼4명 정도다. 무리 가운데는 ‘베테랑 피험자’가 눈에 띈다. 그는 ‘선배’ 입장에서 종종 코치를 일삼았다.

“화투 가져왔지? 내일 모래 아침까지 병원 안에 있어야해. 나가지도 못해. 오늘은 청소년 월드컵 축구 경기를 하니까 그거 보고, 내일은 화투로 시간 죽이자. 그리고 내일 아침은 없어. 저녁 많이 먹어 둬야된다.”

기자는 ‘신출내기’인듯 보이는 피험자 B3번, 이모(21)군과 같은 식탁에 앉았다. 이군은 친구 따라 임상시험에 참여한 경우였다. 친구가 의대 본과 1학년인데, 임상시험 알바(아르바이트)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정작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오지 못했다고 했다.

“이 약 먹고 자살한 부작용 사례도 있다던데, 걱정 안되냐”고 묻자 이 군은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넌 알았느냐?”며 옆자리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다른 친구는 “그거 저번 신체검사 때 나눠준 자료에 있더라. 읽어보니까 2세에게도 별로 안 좋은 약이라던데”라고 했다. 이 군은 혼잣말로 농담 반, 진담 반 “죽으면 어떡하느냐”고 했다.

부작용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피험자는 만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약은 시판중인 약과 같은 성분으로 만든 카피약이다. 실제 안전성에 문제가 있어보이진 않는다.

게다가 피험자들에게는 부작용에 대한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바로 ‘돈’이다. 피험자에게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것이라는 ‘이타적 동기’는 낄 틈이 없어 보였다. 그들에게 임상시험은 쉽게 돈 버는 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 피험자는 “이거 얼마나 쉽게 돈 버는 거냐. 시간당 70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일주일 내내 해도 30만원 벌기 어렵다. 이건 조금만 고생하면 45만원을 벌 수 있지 않으냐”며 웃었다.

오후 8시 피험자들은 TV 앞에 둘러앉아 아시안컵 8강전 한국 대 이란 경기를 자유롭게 지켜본 뒤 오후 10시 일제히 잠을 청했다. 임상시험 첫날은 이렇게 저물었다.



#3 채혈, 채혈, 채혈… : 23일 둘째 날 오전 7시30분

“기상하세요!, 기상!”

오전 6시45분 곰살맞던 코디네이터가 앙칼진 목소리로 잠을 깨웠다. 피험자들은 잠을 덜 깬 채 화장실 앞에 긴 줄을 만들었다. 샤워장과 세면대가 한 군데밖에 없어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혈압들 재고, 수혈합니다.” 오전 7시 남짓 씻는 둥 마는 둥 세면장에서 나와 혈압을 쟀다. 내 혈압은 80∼120 전후 ‘정상’. 코디네이터는 오전 7시30분부터는 첫 채혈을 한다고 했다. 약은 8시에 먹는데, 투약 전 혈액을 한번 채취한다는 것이다.

5평 남짓한 센터 로비가 환자복을 입은 피험자들로 뒤죽박죽이다. 일부는 씻겠다고 줄을 서고, 마침 화장실 앞에 혈압측정기가 있어 줄이 뒤엉켰다. 그 사이를 비집고 코디네이터들이 하나 둘 출근했다. 한 여성 코디네이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채혈을 준비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또 다른 코디네이터에겐 언뜻 풋내가 났다.

채혈 시간표를 봤다. 각 피험자는 2분 간격으로 피를 뽑았다. A1과 B1, A2와 B2 이렇게 각 그룹 15명이 짝을 이뤄 하니까, 30명이 채혈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15×2분)이었다.

오전 7시32분 채혈실에 앉았다. 초보로 보이는 코디네이터가 어설프게 주사 바늘을 꽂았다. 뭔가를 잘못한 탓인지, “탁”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순간 화들짝 놀랐으나, 최고 ‘연장자’라는 부담에 의젓하게 굴었다. 당황한 코디네이터. “미안하다”며 다시 추슬렀다.

오전 8시 약을 먹고 30분 뒤 두 번째 채혈을 했다. 이후 채혈은 한 시간 간격으로 계속됐다. 오전 9시2분, 10시2분 …나는 매시간 2분에 채혈을 했다. 하루 동안 채혈하는 횟수는 모두 11번, 한번 채혈량이 10㎖니까 각 피험자는 하루에 피 110㎖를 뽑은 셈이다.



#4 “물 먹지 말라”, “잠 자지 말라” : 오전 9시∼ 오후 6시

시험 내내 연구 책임자는 딱 한번 현장에 나타났다. 병원 소속 한 교수였는데, 오전 9시쯤 뒷짐진 채 휙 둘러본 뒤로 다시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선임인 듯 보이는 여성 코디네이터가 이것 저것 지시했다. 피험자를 직접 관리한 연구원은 지난밤 우리와 ‘숙직’했던 남성 코디네이터였다.

코디네이터는 피험자들에게 뭔가를 시키진 않았다. 대신 하지 말라는 건 투성이었다. 투약시 마셨던 물(240㎖)을 제외하고는 금식을 강조했다. 그리고 항상 깨어있으라고 주문했다. 그는 “잠을 자거나 뭔가를 먹을 경우 약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피를 많이 뽑아서 그런지 피험자들은 돌아가며 하루종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코디네이터는 그럴 때마다 피험자들을 툭툭 치며 연방 깨웠다.

시험 진행은 단조로웠다. 피험자들은 각기 자신의 소일거리로 시간을 죽였다. 저쪽 침대방 구석에서는 화투판이 열렸고, 로비에서는 독서와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TV를 시청했다. 시간을 보내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채혈만 하면 됐다. 일부 피험자는 조금씩 지겨워하는 눈치였다.

반면 코디네이터들은 상당히 바빠 보였다. 특히 채혈 담당 코디네이터 둘은 눈코 뜰 새 없었다. 채혈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우선 직전 채혈 때 주사했던, 혈액 응고제를 빼고, 피를 수혈한 뒤 다시 채혈 응고제를 주사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이를 한 피험자당 2분에 끝내기는 버거워 보였다. 오후가 되니 초보 코디네이터 한 명이 채혈을 도 맡았다. 그러다 보니 채혈 시간이 2∼3분 늦게 이뤄지는 경우도 있었다.



#5 “생동성 임상시험, 방학이 제철이죠.” : 오후 6시∼ 취침





저녁식사 시간 담당 코디네이터와 ‘합석’을 했다. 그는 대뜸 기자에게 “학생이냐”고 물어왔다. “예…”라며 말끝을 흐렸다. 살짝 진땀이 났다. 화제를 바꿀 겸, “일이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바로 “많이 힘들다”며 맞장구를 친다. 특히 요즘은 방학이어서 시험이 몇 건 몰렸다고 했다. 생동성 시험에서는 80∼90%가 모두 대학생이란다. 결국 국내 제약사들은 대학생 방학 기간을 기다렸다 카피약 임상시험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개학시즌이 오면 식약청에 승인신청을 한다.

“임상시험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냐”고 물었다. “간혹 있다”고 했다. 만일 그렇다면 제약사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라고 했다. 수천만원이 그냥 날아간다는 것이다. 코디네이터는 “그런 점 때문에 문제없이 진행하려고 신경을 많이 쓴다”고 했다.

둘째 날 저녁은 좀 길다. 10시 취침 시간이 지났는데도, 다른 방에서는 계속 화투가 계속됐다. 나이 때문인가? 같이 피를 뽑았는데, 다른 피험자들보다 더 피곤한 느낌이다. 일찌감치 졸음이 몰려왔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날 피가 말라가는 악몽에 시달렸다.



#6 “혈압 낮으면, 방에 가서 뛰고 와” : 24일 셋째 날 오전 8시

전날 아침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다만 퇴원하는 날이어서인지 다들 표정이 밝다. 오전 8시 피를 뽑은 뒤 혈압 측정을 하면 시험이 일단락되는 상황이었다. 빨리 퇴원하고픈 생각에 피험자들은 피를 뽑자마자 줄지어 혈압 측정을 했다.

“혈압이 좀 낮네. 저기 침대방에서 뛰고 와. 혈압 높이는 데는 그게 제격이야.”

선임 코디네이터가 한 피험자 혈압 수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이렇게 말했다. 피험자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침대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코디네이터는 한 술 더 떴다. “이 친구는 높네. 좀 있다가 재자.” 5분 뒤 피험자가 다시 제출한 측정치도 높게 나오자, 코디네이터는 다른 사람의 혈압 측정치를 기록했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실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약의 사용상 주의사항에는 ‘이 약의 투여로 일부 환자에게서 혈압 상승이 보고됐다’고 적혀있다.

순간 시험의 신뢰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채혈 시간을 2∼3분 어기는 것은 일손이 부족해 그렇다 쳐도, 혈압 측정치를 조작한 것은 연구윤리 기본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시험약이 허위 연구 데이터로 시판 승인을 받는다면, 기존 약과 같은 효능일 것이라 믿고 카피약을 사먹는 많은 환자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기자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혈압이 높게 나왔던 피험자에게 “혈압 측정치가 잘못 기록됐다”고 말했다. 그러자 피험자는 별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기본적인 연구윤리를 지키지 않는 임상시험 코디네이터를 목격한 것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 임상시험이 알바로 알려지면서 ‘임상시험=돈’으로 생각하는 피험자들의 안일한 인식도 걱정스러웠다. 생동성 시험이 안전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부작용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게 마련이다. 오전 8시30분 꺼림칙함을 뒤로하고 임상시험센터를 나섰다.



에필로그

우 기자가 체험한 임상시험은 이번 2박3일 합숙이 전부가 아니었다. 24∼27일까지 매일 아침 8시에 채혈을 하고, 그 다음주에는 A그룹과 B그룹이 약을 바꿔 2박3일 투숙하는 등 추가 일정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기자는 취재 일정 때문에 임상시험 모든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지난 8일 임상시험센터 담당 코디네이터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취직하셨어요? 원래 하루만 참여하면 안 드리는데, 2박3일 고생하셨으니까 15만원 보내드릴게요. 통장하고 신분증 사본 팩스로 보내주세요.” 코디네이터 말에는 30줄 넘어서도 취직을 못 한 기자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취재팀은 ‘알바비’ 15만원을 우리나라 보건의료 시민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에 기부하기로 했다.


특별기획취재팀 special@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지지 하디드 '완벽한 미모'
  • 지지 하디드 '완벽한 미모'
  • 웬디 '상큼 발랄'
  • 비비 '아름다운 미소'
  • 강나언 '청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