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무일왕 큰사당 ‘헤이안신궁’(교토) 신전 어귀. |
이곳의 위치는 초행길에 좀처럼 찾아가기 힘들다. 교토시 서쪽 외곽지대(京都市 西京區 大枝沓掛町)로서 ‘한큐 아라시야마선’ 전철의 가쓰라(桂)역에서 내려 시(市)버스 니시5계통(西5系統)으로 갈아타고 ‘가쓰라사카구치’ 버스정류소에서 하차한다. 여기서 다시 도보로 약 15분 거리의 라쿠사이(洛西) 주택단지 인근의 야산인 이세코산(伊勢講山) 정상에 자리한다. 굳이 지적하자면 대부분의 일본 ‘교토관광 안내’ 책자 등에는 ‘다카노노 니가사 오에릉’을 밝히고 있지 않다.
서기 794년에 지금의 교토땅을 고대 일본의 새로운 왕도 ‘헤이안경’(平安京)으로 개창한 이름 높은 인물이 간무일왕이다. 그의 생모인 백제 여성 다카노노 니가사를 하루아침에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온 세계에다 새로이 인식시킨 것은 지금의 일왕 아키히토(明仁·1989 등극∼현재)였다. 2001년 12월23일, 아키히토 일왕은 자신의 68회 생일을 맞아 황거(도쿄의 천황궁, 千代田區千代田1-1)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하던 자리에서 ‘내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다음처럼 진솔하게 공언했다.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501∼523 재위)의 자손이라는 것이 ‘속일본기’(續日本紀, 서기 797년 일본 왕실 편찬)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습니다”(‘朝日新聞’ 2001.12.23). 그날 황거에서 거행된 아키히토 일왕의 기자회견 내용은 일본의 일간지 중에서 오로지 ‘아사히신문’에서만 일왕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백제왕실과 한 핏줄로 이어왔다는 사실을 꾸밈없이 생생하게 보도했다. 일본의 다른 신문, 이를테면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이나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등 모든 신문은 아키히토 일왕의 한국 핏줄 언명 부분을 일체 묵살해 버렸다.
아키히토 일왕의 일왕가와 백제왕실과의 진솔한 혈연 내용 발표에 당황하거나 놀란 일본인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아키히토 일왕의 공언이 있은 지 4개월째였던 2002년 3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일본어판 다카야마 히데코(高山秀子) 기자는 백제 여성 다카노노 니가사의 ‘오에릉’ 취재를 하면서 다음처럼 지적했다.
◇‘교토어소’의 ‘시신전’(현재 헤이안경의 옛 왕궁 옥좌).(왼쪽)◇고닌일왕 왕후 다카노노 니가사 오에릉. |
“일본의 수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인과의 혈연관계를 공적으로 인정한 일왕의 성명에 대해 ‘아무것도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고 무뚝뚝하게 군다. 그러면서 조선 문화가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들 말한다. 정말 그럴까. 교토에 있는 다카노노 니가사 묘지(오에릉) 주변의 주민들은 니가사가 조선인이었다는 것은 몰랐다고 입을 맞춘다. 대숲으로 둘러쳐진 니가사의 묘는 산책이며 하이킹에 잘 어울리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그곳에는 간무일왕의 어머니라는 것이며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그의 경력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 여자였다니요? 전혀 몰랐어요’라고 이웃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는 한 주부는 놀란다. 일본인들에게 이것이야말로 다카노노 니가사라는 여성의 역사를 아는 좋은 기회가 아닐 것인가. 그것은 일본인 자신의 역사를 아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ニユ-ズウイ-ク’ Newsweek 〈天皇家と朝鮮〉 2002.3.20일자 일어판)
간무일왕의 생모 다카노노 니가사(이하 본성명 화신립) 왕후의 초상화가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일본 왕실 관찬 역사책 ‘속일본기’에서는 그에 관해 여러모로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왕후의 조상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의 왕자 순타(純陀) 태자로부터 이어지고 있다. 왕후는 덕망 넘치며 우아한 모습으로 귀품을 갖춰 젊은 날로부터 평판이 드높았다. 엔랴쿠 9년(790년)으로 거슬러서 ‘왕태후’의 존호를 추서하였다.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주몽)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精)을 감응하여 탄생했다. 왕태후는 그 후손이다. 그 때문에 시호(諡號)를 천고지일지자희존(天高知日之子姬尊)으로 받들어 모셨다”고 썼다. 왕후 묘소 옆에 세워진 궁내청(宮內廳·천황궁 관청) 현판에는 이 시호만이 밝혀져 있다.
화신립 왕후는 서기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일본 왕실로 건너온 조신 화을계(和乙繼·야마토노 오토쓰구·7∼8C)라는 백제 왕족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신라계의 귀족 여인 하지노 마마이(土師眞妹)다(‘신찬성씨록’). 화을계는 왜 왕실에 와서 ‘야마토노 아소미’(和朝臣)라는 고관으로 우대받던 조정의 신하로서 본래 백제 무령왕 후손이었다. ‘야마토’(和) 성씨는 백제 무령왕의 왕성(王姓)이기에 ‘일본’을 상징하는 ‘야마토’(和)는 그 옛날의 백제 왕실과의 연고가 드러난다.
◇‘헤이안신궁’의 붉은 ‘도리이’(솟대). (왼쪽) ◇주택단지 골목의 ‘오에릉’ 입구 표석. |
교토산대 고대사학 담당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화씨부인은 제 아비가 왜 왕실의 조신이었기 때문에 시라카베(白壁·709∼781) 왕자와 결혼했다. 이 시라카베 왕자가 뒷날의 고닌(光仁·770∼781년 재위) 일왕이다. 고닌일왕이 등극한 것은 그의 나이 이미 환갑이 지난 61세 때의 일. 일왕 계승을 둘러싸고 일왕가가 왕권 쟁탈로 극히 험악하고 어수선했던 시대에 그는 늙은 왕자의 몸으로서 왕위에 올랐다”(‘桓武天皇’ 2006)고 했다. 그의 윗대에서 일왕들이 폐제(廢帝)되거나 또는 거듭 왕으로 복귀하는 중조(重祚) 등, 그야말로 왕실의 살벌한 정치상황에서였다. 더구나 왕위 계승자가 결정되지 않았던 시대의 여러 왕자들 중의 하나였던 노인 시라카베 왕자. 그 당시 입 한번 벙긋 잘못 놀려 폐왕자 되는 자도 있었다. 그러기에 늙은 시라카베 왕자는 애꿎은 화를 피하느라 때로는 고의로 무능한 술주정뱅이 처신을 하며 남 모르게 행방을 숨겼고, 고심참담하게 이리저리 몸을 사려 용케도 재앙을 면하여 끝내 옥좌에 올랐다.
시라카베(제49대 고닌일왕)가 왕자 시절에 화신립 왕후와 결혼한 후, 둘 사이에 첫 왕자 야마베(山部·뒷날의 제50대 간무일왕) 왕자가 태어난 것은 서기 737년. 그러기에 아버지 고닌일왕이 등극했을 때 야마베 왕자는 이미 그 나이 34세의 청년이었다. 이 당시 어머니 화신립 왕후는 50세 전후였다고 본다. 화신립 왕후는 뒷날, 아들 간무일왕이 등극한 후 8년째였던 서기 7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라카베 왕자는 770년 10월에 일왕 자리에 등극하자 서넛을 헤아리던 왕자비들 중에서 가장 나이든 화신립 왕후가 아닌 가장 나이 젊은 이노우에(井上·생년미상∼775) 공주를 첫 번째 왕후 자리에 앉혔다. 이 당시 이노우에 공주는 고닌일왕과의 사이에 11살짜리 왕자인 오사베친왕(他戶親王·759∼775)이 있었다. 최초의 왕후가 된 젊은 이노우에 공주는 제45대 쇼무(聖武·724∼749 재위) 일왕의 공주였다.
왜 왕실에서의 근친결혼은 다반사였다. 일왕이나 왕자도 여러 비빈을 거느렸던 것은 한국 왕실과 진배없다. 고닌일왕이 등극한 이듬해인 서기 771년 1월에 이노우에 공주의 몸에서 태어난 오사베왕자(당시 12살)가 여러 왕자 형들을 물리치고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후 이노우에 공주는 황실 여인천하의 독부였다. 젊은 왕후는 고닌일왕의 손위 친누이 나니와(難波) 공주를 저주하며 남몰래 그녀를 암살하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저질렀다. 야마베 왕자(간무일왕)의 친고모인 나니와 공주는 34세의 친조카 야마베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오래도록 고닌일왕과 조신들에게 강력하게 밀어댔던 것. 이에 반감을 품었던 이노우에 왕후는 자신의 친쇼무일왕계 세력과 손잡고 늙은 남편 고닌일왕을 닦달하며 제 어린 아들을 끝내 왕세자로 책봉시켰다. 그러나 고닌일왕의 옹립자였던 조신 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732∼779) 참의(參議) 세력은 이노우에 왕후가 나니와 공주를 저주하여 살해한 흑막을 끈질기게 파헤쳐 끝내 그녀의 죄상을 밝혀냈다.
실은 이노우에 왕후는 남편 고닌일왕마저 저주하다가 서기 772년 3월에 폐위되었고, 다시 5월에는 왕세자 오사베 왕자도 어미의 대역사건에 연좌되어 폐서인되었다. 이들 죄인 모자는 773년에 멀리 우치군(宇智郡)으로 유배되었다가 775년의 똑같은 날 동시에 죽었다(독살설). 772년 5월 왕세자를 폐서인한 조정에서는 곧 35세의 야마베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함으로써 이노우에 왕후에게 곤혹스럽게 시달려 왔던 화신립 왕후에게 마침내 새빛이 비쳤다. 끝으로 간략하게 부기하자면 간무일왕의 생부 고닌일왕(袋草子·1156∼58)도 백제인 후손이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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