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 애송하던 해맑은 '혜화동 할아버지'
87년 동안 우리 곁에 머물렀던 김수환(세례명 스테파노) 추기경은 소외된 이웃들의 정겨운 벗이자 선한 목자였다. 격동기에 처한 한국 사회에서 자유와 인권,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양심의 대변자였다. 교회 안에서는 쇄신을 통한 복음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으며,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실천한 참신앙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김수환 추기경이 1989년 10월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세계성체대회 장엄미사를 마치고 방탄차에 올라 신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서울 여의도광장을 지나가고 있다. |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시 남산동 독실한 교인 집안에서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 탄압으로 가족들은 대구를 떠나 이곳저곳 전전하며 옹기를 팔아야 했다. 김 추기경은 이러한 사연으로 자신의 아호를 ‘옹기’라고 정했음을 훗날 털어놓기도 했다.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을 여의면서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순교자의 후손답게 신심이 깊었던 모친의 권유에 따라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1951년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동료와 함께 사제로 서품돼 모친의 꿈을 이룬다.
신부로서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 본당이었다. 이어 1953년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거처 1955년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1956년에는 독일 뮌스터대학에 유학해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64년 귀국하던 해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에 취임해 당시 사장 신분으로 직접 기사를 쓰고 번역까지 하며 1년8개월 동안 밤낮없이 땀을 쏟아 가톨릭 언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66년 44세에 마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다. 이때 택한 사목 표어가 바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이때부터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그의 ‘위하는 삶’이 본격 막이 올랐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 곁에… 김수환 추기경이 1951년 사제 서품 직후 어머니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추기경이 되기 1년 전 그는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해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대교구장 취임 직후부터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과 불확실한 노동 문제 등에 관한 강직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그는 생전에 양평동 뚝방동네 철거민촌에 들어가 함께 살았던 빈민운동가 고 제정구 의원과 미국인 정일우 신부의 정신을 높이 사 백방으로 돕고자 노력했다. 뚝방동네가 철거 위기에 놓이자 부지 구입을 도와 이들 철거민을 경기 시흥시 신천리 새 보금자리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당시 제정구, 정일우 두 사람은 물론이고 김 추기경마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꼽힌 터여서 그로서는 대단한 용기였다.
테레사 수녀와… 1981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마더 테레사 수녀와 만난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불평등·전쟁 등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의 궁극적 해답을 갖고 계셨다”고 회고했다. |
김 추기경은 75세 때인 1997년부터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여러 차례 서울대교구장직의 사임을 요청했으나 만류됐고, 이듬해 겨우 허락 받을 수 있었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 추기경의 사회교리 목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공동선 추구였다. 그는 사회 구조나 정치 형태가 모두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동시에 평등한 권익을 보장하고 특권 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스스로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내면의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교회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실천 과정에서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와 같은 사회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70∼80년대 유신체제에서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던 민주인사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고, 구국과 정의 회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당시 그의 한마디는 우리 사회를 크게 움직였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정치권력으로부터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아오던 한국 천주교는 대내외적으로 지위가 크게 격상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온 김 추기경. 그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장애인을 만났고, 사형수들을 만났으며, 강제철거로 길거리에 나앉은 빈민들을 찾아나섰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일신을 아끼지 않았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즐겨 애송했던 해맑은 성직자 ‘혜화동 할아버지’를 우리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학력과 경력
1922년=대구 출생
1941년=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
1951년=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1951년=사제 서품, 대구대교구 안동본당 주임
1953년=대구대교구 교구장 비서
1955년=대구대교구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1963년=독일 뮌스터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전공
1964년=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
1966년=주교 서품, 마산 교구장 착좌
1968년=서울대주교 승품,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착좌
1969년=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서임
1970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1차 역임)
1981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2차 역임)
1998년=서울대교구장 및 평화교구장 서리 퇴임
2001년=사이언 북 스타트운동 상임대표
■명예 박사 학위
1974년=서강대 명예 문학박사
1977년=미국 노트르담대 명예 법학박사
1988년=일본 상지대 명예 신학박사
1990년=고려대 명예 신학박사
1994년=연세대 명예 신학박사
1995년=대만 푸젠 가톨릭대 명예 철학박사
1997년=필리핀 아테네오대 명예 인문학박사
■상훈
1970년=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제13회 십산상(성균관대학교)
2000년=제2회 인제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대십자공로훈장(독일)
2002년=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십자훈장(칠레)
1922년=대구 출생
1941년=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
1951년=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1951년=사제 서품, 대구대교구 안동본당 주임
1953년=대구대교구 교구장 비서
1955년=대구대교구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1963년=독일 뮌스터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전공
1964년=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
1966년=주교 서품, 마산 교구장 착좌
1968년=서울대주교 승품,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착좌
1969년=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서임
1970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1차 역임)
1981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2차 역임)
1998년=서울대교구장 및 평화교구장 서리 퇴임
2001년=사이언 북 스타트운동 상임대표
■명예 박사 학위
1974년=서강대 명예 문학박사
1977년=미국 노트르담대 명예 법학박사
1988년=일본 상지대 명예 신학박사
1990년=고려대 명예 신학박사
1994년=연세대 명예 신학박사
1995년=대만 푸젠 가톨릭대 명예 철학박사
1997년=필리핀 아테네오대 명예 인문학박사
■상훈
1970년=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제13회 십산상(성균관대학교)
2000년=제2회 인제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대십자공로훈장(독일)
2002년=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십자훈장(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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