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 작성된 조선 태조 이성계의 호적에는 호주의 관직과 녹봉, 자손, 형제, 조카, 노비까지 기록돼 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호적을 처리하는 아전은 큰 고을에서는 넉넉히 1만냥을 먹고, 작은 고을이라도 3000냥을 넘게 먹는다”고 기록했다. 군포 등 세금의 근거가 되는 호적을 새로 작성할 때마다 아전의 횡포가 심했다는 것이다.
손병규 성균관대 교수는 저서 ‘호적,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에서 “호적만큼 다양한 인간들이 다양한 일생을 보낸 기록을 찾긴 어렵다”고 단언한다. 족보도 가족관계 등을 담고 있지만 일부 계층에 국한된다는 데 한계가 있다. 호적은 이제 가족관계등록부로 바뀐 채 존속하고 있다.
정부는 4월13일 임시정부 수립 90주년 기념식에서, 무호적 상태로 숨진 독립운동가 300여명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새로 만들어 유가족에게 전달한다. 지난달 무호적 독립운동가도 가족관계등록부에 등재되도록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개정된 데 따른 조치다.
이들은 일제가 1912년 ‘조선민사령’을 제정해 호적을 만들 때 호적 등재를 거부해 사실상 무국적자가 됐다. 단재 신채호는 해방 후 유골로 귀향했을 때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매장 허가가 나지 않아 유가족이 어려움을 겪었다는 일화도 있다. 우리나라엔 별도의 국적부가 없기에 가족관계등록부가 국적에 관한 증명부 역할을 한다.
일제 당시 ‘무국적’ 독립운동가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야 국적을 회복했다는 것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데 해방이 되고서도 무려 64년의 세월이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만주와 시베리아 등 험한 곳을 전전하며 광복의 꿈을 키우던 이들을 너무도 쉽게 잊고 살았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지 걱정된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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