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옛 세관 건물 입구에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라는 이름의 현대미술관이 이날 개관했기 때문이다. 푼타 델라 도가나는 세계적인 컬렉터인 프랑스 출신의 프랑수아 피노(73)의 컬렉션을 보여주는 미술관으로, 베네치아 내 최대의 현대미술 전시장이다. 고대와 중세 등 유구한 역사적 전통으로만 유명한 이탈리아에서 최신 현대미술을 대거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팔라조 그라시 입구에 들어서면 마치 나이트클럽에 온 듯한 흥겨운 느낌을 받는다. 폴란드 출신의 피오트르 우클란스키의 ‘춤추는 나치’는 벽면에 200장의 나치 이미지와 음악에 따라 다양한 색의 불이 들어오는 바닥으로 구성됐다. |
피노는 구치, 이브생로랑, 발렌시아가, 스텔라 매카트니, 푸마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명품그룹 PPR 대주주이다. 그는 또 세계적 경매회사 크리스티와 프랑스 축구팀 스타드 렌의 소유주이기도 하다. 지난해 포브스 발표에 따르면 피노는 재산 169억달러를 보유해 전 세계 부자 중 39위를 기록했다. 또 2007년 영국의 예술잡지 아트리뷰가 선정한 ‘세계 예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 1위로 꼽히기도 했다.
피노의 컬렉션을 보여주는 미술관은 2006년 베네치아에 문을 연 ‘팔라조 그라시’(palazzo grassi)에 이어 이번 푼타 델라 도가나가 두 번째다. 푼타 델라 도가나의 개관을 기념하는 오프닝 전시는 ‘매핑 더 스튜디오: 프랑수아 피노 컬렉션의 예술가들(Mapping the Studio)’이다. 전시 제목은 브루스 나우먼의 비디오 설치작품 제목에서 따왔다. 예술가의 작업실과 컬렉터의 예술을 향한 열정의 연관성을 드러낸다는 의미다.
피노는 “컬렉터에게 있어 예술품을 소장하는 것은 예술가의 창조과정에 긴밀히 연관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전시는 수세기 전부터 계속됐던 전통인 ‘패트론’ 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덧붙였다.
푼타 델라 도가나와 수상버스로 5∼10분 떨어진 팔라조 그라시 두 군데서 이뤄지는 전시는 피노의 소장품 1400여점 중 일부로, 20세기 중반부터 최신작까지 다양한 시대, 동서양의 다양한 작가를 아우른다. 제프 쿤스, 신디 셔먼, 리처드 프린스, 시그마 폴케, 사이 톰블리, 무라카미 다케하시, 매튜 데이 잭슨, 아델 압데세메드, 리처드 휴즈 등의 작품이 전시됐다. 지금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현대예술가들이 총망라돼 있다. 아시아 작가로 중국과 일본 작가의 작품은 있지만 아쉽게도 한국 작가의 작품은 없다.
◇푼타 델라 도가나 뒤뜰에 설치된 찰스 레이의 조각 작품. |
푼타 델라 도가나는 원래 15세기에 세워진 세관 건물로 지난 30여년간은 버려진 곳이었다. 건물의 리노베이션은 팔라조 그라시에 이어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맡았다. 안도는 수백년간 이뤄졌던 각종 개보수를 걷어내고 건물의 기존 뼈대를 살려냈다. 벽돌로 이뤄진 벽면과 나무 구조물의 천장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에 안도의 특징인 콘크리트 패널이 군데군데 설치됐다. 건물 내부는 고전과 현대가 어우러진 모던한 공간으로 재탄생됐다. 두 운하 사이 삼각주 모양의 지형에 자리 잡은 푼타 델라 도가나의 리노베이션은 14개월 동안 계속됐으며, 모두 2000만유로가 투입됐다.
2006년 베네치아시가 옛 세관 건물을 현대미술 전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피노 측과 구겐하임 재단이 후보로 나섰다. 두 재단의 치열한 경쟁 끝에 2007년 4월 현대예술 소장품이 더 많은 피노 측이 낙점됐다. 안도가 내부와 외부 인테리어를 맡은 리노베이션은 2008년 1월부터 2009년 2월까지 진행됐다.
푼타 델라 도가나와 함께 피노의 컬렉션을 전시하는 팔라조 그라시는 원래 1983년부터 2005년까지 지아니 아그넬리의 컬렉션을 보여주는 미술관으로 쓰였다. 하지만 아그넬리가 죽자 팔라조 그라시는 2005년 2월 달리 전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미술에 관심이 높았던 피노는 2005년 미술관을 인수하면서 팔라조 그라시 SPA재단을 설립했다. 이때도 건물 리노베이션은 안도가 맡았으며, 2006년 4월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Whrer are we going)’라는 제목의 첫 전시를 선보였다. 이어 2006년 ‘포스트 팝’, 2007년 피노의 회화와 조각 컬렉션을 보여주는 ‘시퀀스 I’ 등 꾸준히 피노의 컬렉션을 대중에게 선보여 왔다. 이 같은 피노의 미술관 설립과 컬렉션 공개는 현대미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을 받는다.
베네치아=글·사진 김지희 기자 kimpossibl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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