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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첫 옥살이를 했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사회주의 노선에 근거해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7년간 복역했다. 광복 후 박헌영 계열과 노선 갈등을 빚다가 공산주의와 결별했고, 제헌의원을 거쳐 국회부의장 자리까지 올랐다. 1952년과 1956년 대선에서는 80만여표와 200만여표를 얻으며 이승만 대통령을 위협했다. 이후 진보당을 창당한 그는 1958년 1월 국가반란 혐의로 체포됐다. 곧이어 간첩 혐의까지 받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9월 조봉암 사건을 ‘위협적인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와 피해 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권고했다. 이에 따라 그의 유족이 2008년 8월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지난해 10월 받아들여졌다.
2011년 1월2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이용훈 대법원장은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피고인 망(亡) 조봉암. 유죄 부분을 파기한다.” 사형 집행 52년 만이다. 이 대법원장은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했다고 볼 수 없고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결성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간첩 혐의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무죄가 되면 쓰려고 비워 둔 아버지의 비문을 이제 써 넣어야겠다.” 죽산의 딸 조호정(83)씨가 대법원의 무죄 선고에 대해 털어놓은 소회가 가슴 아리다. 죽산은 좌우의 극단적 이념 대립이 빚어낸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사법부가 뒤늦게나마 재심판결로 잘못을 바로잡은 것은 다행이다. 사형이 정치적 도구로 악용되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한다.
안경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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