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몸에 박힌 파편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살을 에는 파편에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그날’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흐릿해지고 있다. 2002년 6월29일, 제2연평해전에서 살아 남은 김택중(31·사진)씨에게 그날은 끔찍하도록 생생하다.
김씨는 참수리 357호의 막내 병사였다. 원래는 식사 당번이어서 함정을 타지 않고 연평도 기지에 있었는데, 곧 전역할 선임병을 대신해 일을 배우러 올라탔다. 그날이 하필이면 6월29일이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근은 북한 함정의 출몰 등으로 하루에도 서너번씩 긴급 출동 명령이 떨어진다. 그날도 북한 함정이 남한 해역으로 넘어오려 해 참수리 357호가 출동했다. 그런데 북한군의 반응이 다른 때와 달랐다. 평소처럼 바로 선체를 되돌리기는커녕 오히려 계속 접근해왔다.
“총을 든 북한 병사 얼굴이 두 눈에 보일 만큼 가까이 왔어요.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포탄) 불꽃이 쏟아졌습니다. 전쟁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었죠.” 참수리호 선체 위로 포탄이 마구 날아왔고, 수류탄 상자에서는 화염이 피어올랐다.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누군가 ‘야 이 새끼야, 빨리 소화기 찾아와 소화기!’라고 고함을 쳐 바로 선체 내부로 달렸다. 배 안은 연기로 가득 차 있었고, 바닥에선 핏물이 출렁거렸다. 순간 뜨거운 느낌이 온몸을 짓눌렀다. 포탄을 맞아 부서진 선체 파편이 그의 몸을 뚫고 들어온 것. 30분도 안 돼 전우 6명이 목숨을 잃었고, 참수리호는 침몰했다.
김씨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다른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시절, 생존자들은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정부와 군은 무심했다. 김씨는 국군 수도병원에서 10여일을 보내고 평택 의무대로 옮겨진 뒤 한 훈련에 동원됐다. 제2연평해전 이후 의무대에서 갑자기 생긴 ‘부상자 치료 훈련’이었는데 ‘진짜 부상자’였던 김씨가 동원된 것. “저도 처음엔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부상자 역할을 하고 있자니 못 참겠더라고요.”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놀란 의무대장은 부랴부랴 김씨를 훈련에서 뺐다.
더 황당한 일도 있었다. 김씨 등 부상병들은 그해 8월, 침몰 52일 만에 인양된 참수리호에 다시 올라야 했다. 곧 일반에 공개될 배를 청소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 달 정도 청소를 했는데 배에 탈 때마다 악몽 같았던 그날이 생각났죠. 다들 ‘미치겠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인데….”
참수리호 모형 관람하는 어린이들 28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 경비함정의 기습 공격을 받고 침몰한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정’ 모형을 관람하고 있다. 빨간색 원은 북한 경비함정이 쏜 기관총탄 자국을 표시한 것이다. 29일 오전에는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제2연평해전 9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이제원 기자 |
9년이 흘렀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참수리 357호를 벗어나지 못한다. 김씨는 사람들이 그날을 잊을까 두렵다고 했다. 전국에 46명의 용사를 위한 분향소가 설치됐던 천안함 사건 추모열기를 지켜볼 때는 못내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천안함 장병들도 나라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지만 제2연평해전 희생 장병들은 말 그대로 ‘전투’를 치렀는데….” 당시 국민은 월드컵 열기에 파묻혔고, 전사자 유족들은 ‘목숨 값’으로 3000만원을 받았을 뿐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2008년부터 서해교전에서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돼 정부 행사가 치러진다는 것.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나라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정읍=이유진 기자 heyd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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