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복 가슴에 이등병 계급장을 단 이재형(24) 소위는 ‘하늘 같은’ 병장을 보자 심장이 쿵쾅 뛰었다. 생활관(내무반) 저 멀리 반대편에 앉아 있는데도 눈을 쳐다보기 힘들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목이 터져라 관등성명을 대며 총알처럼 반응했다. 이 소위는 비흡연자이지만 선임이 담배를 피우러 갈 때 따라나서야 했다. 흡연장에선 모든 후임병들은 왼손에 담배를 쥐었다. 오른손은 언제든 선임에게 경례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등병이 된 박종훈(25) 소위는 일과가 끝난 뒤 생활관에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층층시하’ 선임병의 지시와 주문이 이어졌고, 신병에겐 잔무가 많았다. 예전처럼 구타나 가혹행위는 없었지만 긴장감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챙겨주는 것은 같은 처지의 선배 신병이었다. 일주일 먼저 들어온 선임 이등병이 먹을 것을 챙겨주며 “힘내라”고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신병의 하루는 한 달처럼 길었다. 그나마 이번 신병체험이 3박4일로 끝난다는 것이 한 가닥 희망이었다.
신병체험에 나선 이재형 소위(앞줄 맨 왼쪽)가 생활관에서 ‘선임병’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육군 제공 |
이를 위해 어려보이는 장교 6명이 선발됐다. 이들 장교는 신병과 똑같은 보급품을 지급받고 전투복에 이름을 새긴 후 6개 대대에 배치됐다. 장교들은 나흘간 병사들과 함께 생활관에서 먹고 자고 뒹굴며 고충을 파악했다. 이 사실은 사단장과 사단 사령부 인사참모 외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나흘간 신병 체험을 한 장교들은 20일 20사단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경험담을 발표했다. 선임병이 흡연하면 후임병은 비흡연자일지라도 흡연장에 따라다녀야 하는 어려움, 선임병 앞에서 담배를 피울 때 왼손만 허용되는 등 생생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내무반에서 과자 파티를 마치고 나면 남은 과자는 이등병이 먹어야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이 소위와 박 소위는 나흘 뒤 다시 소대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3박4일간의 이병 체험은 앞으로 소대원들을 이끄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이 소위는 “구타나 가혹행위가 아니더라도 개인의 흡연 습관까지 바꿔야 할 정도로 신병들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박 소위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나니 이등병처럼 긴장감과 두려움, 설렘을 느꼈다”면서 “신병체험 후 사병의 행동을 유심히 보게 됐다. 일주일 선임 이등병이 잘해줬는데 마지막까지 (체험) 사실을 털어놓지 못해 미안했다”고 말했다.
육군 관계자는 이번에 파악한 실상을 토대로 지휘관과 병사를 대상으로 한 교육을 확대하는 한편, 병영문화 혁신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석호 기자 sok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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