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거불능’ 조항 손질해야
전문가들이 가장 문제 삼는 것 중 하나는 성폭력특례법상의 ‘항거불능’ 조항이다. 성폭력특례법은 6조(장애인 준강간·준강제추행)에서 ‘신체장애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에 있음을 이용하여 여자를 간음하거나 추행한 자’를 형법상 강간·강제추행에 준해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법원은 이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해 무죄 판단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에서도 김모 행정실장과 전모 교사의 제자 성추행 공소사실은 “피해자가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모두 기각됐다. 당시 법원은 항거불능을 ‘심리적·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로 규정하면서, 추행 당시 피해자가 ‘싫다’는 의사표현을 한 점과 지능상 현저한 장애 양상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도리어 이를 침해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민병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장애인상담소권역 대표는 “사건 당시 상황과 원인, 가해자와의 관계, 시설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따지지 않고 항거불능을 좁게 해석하면 의식불명자나 장애특성상 꼼짝도 못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조항에 걸린다”고 꼬집었다.
이 같은 경향은 2007년 항거불능 상태를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해 1월 서울중앙지법은 28세의 장애인 피해자가 지적 수준이 15∼16세이고, 빨래 등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한 점, 범행 당시 거부의사를 명확히 표시한 점 등을 근거로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대신 친고죄인 ‘심신미약자 간음’에 해당한다고 봤고,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해 이 사건은 공소기각됐다.
지적장애인 피해자에게 ‘진술 일관성’을 강하게 따지는 경향도 있다. 법원이 사건의 논리적 완결성만을 추구하다 보면 “묻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서 말하지 못하고, 질문 내용과 의도 파악이 어려우며, 어떤 대답이 자신에게 유·불리한지 판단능력이 부족한 장애인의 특성”을 잘 고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14세의 지적장애 청소년(지능지수 40)이 50대 중반 남성에게 성폭행당한 사건을 맡은 법원은 피해자가 범행 당시 끌려 잡힌 손이 ‘왼팔’ ‘양손’ 등으로 상황에 따라 바뀐 점 등을 “진술이 전후 모순된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장애인시설 비리·악행에도 “그동안 봉사해온 게 있어서…”
인화학교·인화원처럼 ‘시설’에서 자행되는 각종 인권침해나 비리도 처벌의 사각지대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장애인시설은 정부 보조금을 받으면서도 감시가 잘 안 되는 폐쇄성 때문에 (성)폭력과 인권침해, 비리가 자주 발생하지만 쉽게 적발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법원은 ‘그동안 지역사회에 봉사한 점’ 등을 들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기 일쑤였다. 춘천지법은 2009년 8월 강원도 원주에서 시설을 운영하며 1억5000만원을 횡령하고 입소자를 학대한 혐의로 기소된 김모(60·여)씨에 대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김씨는 빼돌린 돈으로 개인 빚을 갚고 성형수술을 하는 데 썼으며, 남은 잔반을 수거해 생활인들에게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재판부는 오랫동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장애인들에게 봉사했고 횡령금 중 일부가 건물 건축비에 쓰이고 피해액을 반환했다며 형 집행을 유예했다.
10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사회복지법인 성람재단의 조모 이사장 등도 “횡령금 전액을 반환했고, 복지시설이 드물던 시절에 자신의 재산으로 시설을 운영한 점”이 고려돼 2007년 징역3년,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재단이 시설 일부를 서울시에 기부채납하기로 한 점도 양형에 고려됐다. 하지만 성람재단은 서울시와 법정다툼 끝에 시설을 기부채납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정부 지원비 14억6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사회복지법인 석암재단 운영자 이모씨는 징역 3년 판결을 받았고, 항소심에서 징역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됐다. 당시 재판부도 감형 사유로 “피고인이 범행 이후 피해액을 반환했고, 항소심에서 석암재단에 5억원을 낸 점”을 들었다. 김재철 변호사는 “반성의 의미로 해당 재단에 기부하더라도 족벌재단과 같은 비정상적 구조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이 되기 쉽다”며 “비리 발생 이후 이사장이 친인척으로 교체되고 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고 지적했다.
유태영·이유진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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