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진 지역·미로처럼 얽힌 재개발지구 등
강력범들이 선호하는 '그들만의 공간' 존재
범죄는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다. 그 극단에 서있는 사람들을 ‘범죄자’라고 한다. 범죄자가 어지럽게 널린 골목길, 낙서가 방치된 담벼락, 외진 원룸촌을 돌며 범행기회를 포착하는 사이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를 받는다. 범죄학자들은 이들 범죄자가 따르는 공간의 법칙을 연구해 ‘지리적 프로파일링’이란 이름을 붙였다. 최근 벌어진 각종 강력 사건도 이런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폭력을 유발하고 강화하는 ‘그들만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잔혹한 연쇄 범행은 ▲주거지 35.34㎞ 이내 ▲교통로에 바짝 붙은 후미진 지역 ▲저개발 지구에서 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강력범이 범죄를 저지르기 좋아하는 공간이 따로 존재하고, 우리 사회가 이 같은 공간을 줄여나간다면 범죄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김길태가 범행한 부산 사상구 덕포동 일대. 골목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김길태 같은 토박이들만이 안다. |
아무렇게나 버려진 실타래를 연상케 했다. 어디에서 어디로 골목이 이어지는지, 골목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김길태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부산시 사상구 덕포동 재개발 구역의 첫 인상이었다. 사람 한 사람이 다니기에도 비좁은 골목도 있고, 시멘트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계단으로 억지로 이은 듯한 골목길도 있었다.
“이곳은 아까 지나쳐 왔던 곳인데, 모르겠죠?” 길 안내를 맡은 경찰관의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 지나쳐 온 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안내를 받지 않으면 하루 종일 같은 곳을 맴돌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새로 부임한 경찰관도 이 골목길을 다 익히는 데 2∼3개월이 걸린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2010년 3월 7일 덕포동 인근 가정집 물탱크에서 한 여중생 시신이 나체로 발견됐다. 3일 뒤 인근 덕포시장에서 범인 김길태가 검거됐는데, 덕포동 일대는 그가 어릴 때부터 살아왔던 익숙한 지역이었다.
임준택 동국대 교수가 연쇄살인범 유영철 등 강력범 12명이 저지른 118건의 범죄를 분석하자, 범인들은 주거지에서 범행 현장까지 평균 35.34㎞를 이동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수사망을 피해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 범행을 저지르는 미국의 강력범보다는 이동거리가 짧았다. 100m∼4㎞ 이내는 27.1%, 4.1∼10㎞는 24.6%, 10.1∼40㎞는 28.8%로 파악됐다. 김길태도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던 빈집을 범행지로 골랐다.
최근 검거된 서울 수유동 방화 살인 사건의 주범 강모씨도 이 같은 공간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다. ‘가장 적은 노력으로 범행을 저지른다’는 강력범 범죄수행 법칙을 거스르지 않았다고 했다. 강씨의 첫 범행지는 그의 집에서 1㎞, 두 번째는 7㎞ 떨어져 있었다. 가능하면 집 근처에서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는 뜻이다.
임 교수는 “범행지가 자택에서 멀리 떨어지면 경찰의 의심을 피할 수는 있으나, 피해자를 장악하고 우발적 사고에 대비할 수 없게 된다”면서 “강력범은 가능하면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주거지 근처에서 희생자를 물색한다”고 설명했다.
‘수원 20대 여성 토막살인 사건’의 주범 오원춘은 아예 자기 집안을 범행 장소로 선택한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오원춘이 범행한 수원 팔달구 지동 일대. 오원춘이 범행한 일대는 미로 같은 골목길을 따라 집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 이런 모습은 무질서한 곳에서 강력범죄가 더 잘 일어난다는 프로파일러들의 말과 일치한다. 출처:네이버 지도 |
범인들이 거주하는 곳 인근에 있는 ‘도심 재개발지’는 범행 장소로 사용되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다. 오원춘이 길을 가는 20대 여성을 토막살해한 수원시 팔달구 지동과 김길태가 여중생을 납치해 살해한 부산 사상구 덕포동은 모두 골목길이 얼기설기 얽혀 밤에 다니기 어려운 재개발 지구라는 공통점이 있다. 도심 재개발지다 보니 이웃 간 교류가 별로 없어 범죄신고가 잘 들어오지 않는 특성이 있다.
남기범 서울시립대 교수는 “미개발 지구가 인정이 넘친다는 건 TV매체가 만들어낸 편견”이라며 “경제학에서는 저개발지일수록 각자 생존에 바쁘기 때문에 이웃 간의 신뢰가 낮고 서로에게 무관심하다는 연구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오원춘이 20대 여성을 끌고 가는 동안에도 “부부싸움을 하는 줄 알았다”는 이웃들의 증언이 이 같은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구획정리가 안 돼 미로같이 얽힌 골목길은 치안력의 침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경찰 관계자는 “김길태가 범행한 부산 사상구 덕포동 일대는 차량순찰이 불가능할 만큼 골목길이 좁다”면서 “워낙 미로처럼 얽혀 있어 이곳에 어릴 때부터 살지 않은 사람이 처음 들어온다면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공간을 기반으로 한 복지정책이 범죄율과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게 최근의 연구경향”이라면서 “우리나라의 사회정책도 계층 위주에서 공간 위주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산=박현준·박영준 기자 hjun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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