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짜 보고 싶은 풍경이 세 가지 있다. 동해안 바닷가에서 새벽, 구름 하나 없이 맑은 바다에서 해가 경쾌하고 솟아오르는 장엄한 일출의 풍경과 늦가을 노란 은행잎으로 덮인 영주 부석사 진입로에 온 세상이 금빛으로 물드는 장엄한 일몰의 풍경,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고창 선운사 뒷동산을 빨간 동백이 온통 뒤덮는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다. 동해 일출이야 하늘이 도와야 가능한 일이지만 다른 둘은 조금만 신경 쓰고 부지런 떨면 못 볼 일도 아니건만, 때마다 마음만 급해지고 시간을 맞추지 못해 한 번도 이뤄 본 적이 없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이 시는 미당 서정주가 쓴 ‘선운사 동구’라는 시이다. 담백하지만 여운이 무척 남는다. 선운사로 들어가는 길 초입에는 미당이 쓴 육필원고가 새겨진 소담한 시비가 서 있다. 어느 때건 봄날, 동백이 피보다도 더 진한 빨간색을 뿜어 올리는 장관을 기대하고 갔다가 동백을 못 보고 허무하게 내려올 때 우리는 이 시비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몇 글자 되지 않는 저 담백한 시에서 위로를 받는다. 풀이 죽은 어깨를 툭툭 치며 “세상일이 다 그런 거야∼ 내년에 또 오면 되지” 하며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의 시스템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때가 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일이겠거니 하면서 남은 길을 내려온다.
번듯해진 지금의 사하촌에 걸쭉하게 육자배기를 불러주는 낭만적인 막걸릿집 아낙은 없다. 주차장에 그득그득 들어찬 관광버스와 쏟아져 나오는 관광객만 무수히 보며 시적 정취는 희미해지고 만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전에도 이르거나 너무 늦거나 해서 파란 꽃망울만 보고 오거나 색이 바랜 색종이처럼 희미해진 동백의 자취만 보았을 뿐이다.
그래서 올해는 몇 달 전부터 수첩에 날짜를 새겨 넣고 그날은 모든 약속을 다 비껴놓고 기다렸다. 물론 5월 초가 돼야 동백이 바닥에 깔리기 시작하는 진풍경을 본다지만, 날씨를 종잡을 수 없고 선운사에서 나에게 정보를 전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안전하게 꽃이 피기 시작한다는 사월 하순에 반드시 간다고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간을 기다렸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때에 만든 절이라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따져보면 약 1500년이나 된 고찰이다. 깊은 산 속에 경사진 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는 산지사찰이 아니고 ‘이 절은 백제의 절’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는 듯이 평지를 걸어 들어간다. 사찰의 당우(堂宇)들도 너른 마당에 띄엄띄엄 놓여 있고 무엇보다 언덕 뒤에 모여 있는 3000그루의 동백나무만큼 많은 이야기와 보물이 있는 절이다.
#선운사에서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를 만나다
선운사에 가면 제일 먼저 두 명의 명필을 만나게 된다.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원교 이광사(1705∼1777)가 그들이다.
한석봉과 더불어 대중적으로 무척 많이 알려진 추사는 새삼스레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입신의 경지에 오른 신필이다. ‘추사체’라는 독특한 필법을 창안했고 금석문 연구를 통해 다양한 서체를 실험했고 남겼다. 그에 비해 우리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원교는 추사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살았는데 ‘동국진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다. 마치 불이 활활 타듯이 너울거리는 큰 글씨와 물고기가 유연하게 물속에서 헤엄치는 듯이 굽이치는 작은 글씨들은 보는 이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동국진체라는 글씨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글씨인 선운사 ‘천왕문’ 현판. |
나는 그의 글씨를 전라도 대흥사에서 처음 봤다. 대웅보전 현판과 침계루·해탈문·천불전 등의 현판이었는데 글씨의 크기뿐 아니라 너울거리는 획의 움직임이 놀라웠다.
특히 그곳에서는 추사와 연관된 일화가 유명하다. 제주도 유배 길에 오른 추사가 친한 벗인 초의선사가 주석하고 있는 대흥사에 잠시 들렀다가,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 우리나라 서예를 망쳐놓은 원교의 글씨를 걸어놓았다며 초의선사의 안목을 힐난한다. 대신 자신의 것을 걸어놓으라고 글씨를 써주고 떠났다가, 9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상경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던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그때는 자신이 잘못 보았다며 그 현판을 다시 걸어놓으라고 한다. 그래서 대흥사 대웅전 마당에 가서 보면 원교의 글씨와 추사의 글씨가 90도 각도로 서로 비껴서 있다. 그리고 두 글씨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살이 오르고 기름진 추사의 글씨와 뼈가 앙상한데 화강암이나 금강석처럼 견고하고 삐침이 날카로운 원교의 글씨가 아주 대조적이다.
원교의 글씨는 또 천은사에서도 보았다. 물의 기운을 보존하는 구렁이를 죽인 뒤 화재가 잇따르던 천은사의 현판을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주어 이후 천은사에서 화재가 나지 않고 고요한 새벽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는 바로 그 글씨였다.
그리고 또 그의 글씨를 선운사에서 보게 된다. ‘정와(靜窩)’, 즉 고요한 처소라는 의미를 가진 글씨인데 원래는 대웅전 바로 옆 세 칸짜리 작은 요사채에 붙어있던 현판이었다. 특이하게 현판에 파란색을 입혀놓고 역시 물 흐르는 듯한 필법을 구사하였지만 단아하고 가볍고 모든 번잡과 시끄러움을 잠재울 듯한 글씨였다. 자유롭고 호방한 그의 글씨만을 보다가 본 정서적이며 명상적인 글씨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고요한 집은 선운사를 정비하며 허물어졌고, 그 아름다운 현판도 잠시 크게 지어놓은 요사채의 굵직한 문머리에 붙어 있다가 이제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정와’를 보지 못하니 피지 않은 동백을 보는 것처럼 아쉽고 또 아쉽다. 그 아쉬움을 천왕문 이마에 달려있는 원교의 친필 현판으로 겨우 달래본다.
#살아있는 생명의 즐거움을 안겨준 동백숲
벚꽃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 일주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숲이 짙어지고 절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숲 속에 여러 개의 돌덩어리가 모여 있는 곳이 보이는데 그것들은 모두 부도와 부도비들이다. 대부분 조선시대의 부도인데 그 안에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유명한 ‘백파율사비’가 있다.
여러 시인이 노래했던 선운사 동백숲. 3000그루의 동백 숲이 4월 말에서 5월 초순 피고 지며 장관을 이룬다. |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로 시작해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로 마무리되는 비문은 그간의 사정을 다 떠나서 추사 글씨의 정수를 보여준다.
추사의 글씨는 정말 좋다. 특히 그가 쓴 글씨 중에 계산 김수근에게 써줬다는 ‘계산무진’이나 차를 보내준 절친한 동갑내기 벗 초의선사에게 차 값으로 보내준 ‘명선’ 등의 글씨를 보면, 그건 단순한 글씨가 아니라 광활한 여백을 질주하는 명마 같기도 하고 휘몰아치는 큰 바람 같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글씨가 바로 추사의 만년작인 ‘백파율사비’에 쓴 비문일 것이다. 해서와 행서로 좁은 공간에서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게 자유롭게 써내려간 그의 글씨는 ‘글씨를 쓴다’하는 의식조차 사라진 대가의 경지를 보여준다.
나는 곡성 태안사의 배알문을 본뜬 듯한 야트막한 문을 넘어 제일 먼저 ‘백파율사비’를 보러 가서 오랜만에 앞뒤의 글씨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음미하고 만져보았고, 흡족해하며 나왔다. 그런데 다녀와서 그 비석이 모조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6년에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탁본을 뜨고 비바람에 풍화돼 마모되는 것을 염려해서 근처에 있는 성보박물관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나는 그걸 모르고 앞에서 탄복하고 감격했던 것이다. 원효는 감로수인 줄 알고 해골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데 나에겐 그 경탄의 대상이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아무런 깨우침이 없었다.
원교의 ‘천왕문’ 현판을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서면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키며 불법과 중생을 지켜준다는 사천왕이 앉아있다. 사천왕은 본래 인도 고대종교에서는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서 받아들여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그래서 절로 들어가는 여러 단계의 과정에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데, 칼을 들고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 탑과 셋으로 갈라진 창을 들고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 용과 여의주를 들고 남쪽을 수호하는 증장천왕, 비파를 들고 북쪽을 수호하는 다문천왕이 발밑에 악귀들을 깔고 무섭게 앉아 있다.
그런데 여기는 다른 절과 좀 다르다. 보통 사천왕 앞에는 나무 울타리가 설치되어 사천왕의 상반신만을 보게 되는데, 좀 더 다가가 자세히 보면 어떤 자세로 앉아있는지, 발밑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인다. 선운사 사천왕의 발밑에는 늘 등장하는 악귀들이 아니라 돼지의 코를 한 욕심 많은 남자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찌그리고 우리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음녀 등 제작 당시의 ‘현재성’이 있다. 어떤 이가 이 사천왕상을 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형식을 답습하지 않고 나름대로 해석하여 자신이 사는 시대에 맞게 변용할 줄 아는 의식 있는 작가였을 것이다.
선운사의 경내는 넓다. 일반적인 사찰이 가지고 있는 깊이와 위계가 여기서는 무척 다르게 펼쳐진다. 보통 절의 자리를 잡을 때 안으로 깊게 들어가도록 한다. 그 들어가는 과정이 하나의 종교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고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은 중생의 자리에서 점점 부처의 자리로 들어감을 상징한다.
반면 선운사는 가로가 길고 깊이가 짧은 대지에 집들을 펼쳐놓았다. 다만 절의 핵심공간인 대웅보전 앞에 만세루라고 하는, 누각이라기보다 그냥 마루가 넓은 강당을 하나 놓아 직접적인 접근을 막아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 푸르름이 감아놓은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동백나무 숲이 푹신하게 얹혀 있다.
그리고 드디어 동백숲에 이르렀다. 짙은 녹색 속에 반갑게도 빨간 동백이 보였다. 수령이 오백 년 된 나무들은 그리 노회해보이지 않았고 그 나이에 뿜어내는 빨간색과 녹색은 아주 선명했다. 4월 17일, 동백이 피기 시작한 지는 일주일 남짓 돼 만개하지 않은 채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송이째 떨어지며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살아있는 생명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누군가 뒤에서 일주일 더 늦게 왔어야 한다며 한탄했지만 나는 드디어 선운사 동백을 만난 것에 눈물이 날 정도로 그저 감탄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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