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공들여 집필한 역사서
앙드레 모루아 지음/신용석 옮김/김영사/3만원 |
17세기부터 시작된 근대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을 지탱하는 두 축이었다. 여기에 독일이 끼어들었으나 여전히 유럽 문화의 중심축은 영·불 두 나라였다. 그렇지만 두 나라의 가는 길은 확연히 달랐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면서 공포정치·시민혁명 등 극한 투쟁의 길로 들어섰으나 영국은 세계를 제패하는 초석을 닦으며 승승장구했다. 무엇이 두 나라의 운명을 이토록 벌려놓았을까.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던 작가 앙드레 모루아(1885∼1967)는 두 나라의 이런 차이가 어디서 유래하는지에 천착하면서 ‘영국사-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써내려간 위대한 나라 영국, 그 이천년의 기록!’을 집필했다. 자료 수집에만 10여년이 걸렸고 집필에도 2년을 들인 대작이다. 모루아가 1940년대 초 집필해 시대적으로는 조금 뒤떨어져 있지만 역사서의 백미로 평가받는 수작이다. 어떻게 영국이 유럽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패권을 쥔 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는지, 그 속사정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역사서가 대개 지배계급 중심으로 서술되곤 했으나 모루아는 그런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인문학적 지식을 가미하면서 모든 계층의 삶을 아울러 풀어냈다. 근대 세계를 이해하려면 영국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모루아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사령부의 연락장교로 영국에 파견되면서 영국의 본 모습을 느끼게 된다. 저자 스스로 “영국에 대한 프랑스인의 시각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할 만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 감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유럽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으로, 영국을 경시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영국은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뤄냈다. 문화적으로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셰익스피어를 배출했고, 근대 과학의 아버지 뉴턴을 낳았다. 다른 나라에서 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이룩하지 못한 의회민주주의를 비교적 완성도 높게 평화적으로 성립했다.
오랫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영국의 저력은 상대방에 베푸는 타협과 관용의 정신이었다. 사진은 영국 국회의사당과 시계탑. 세계일보 자료사진 |
지주 귀족과 농민계급, 궁정 귀족과 상인계급 사이에 프랑스의 엄격한 계급차별이 조성해놓은 심각한 대립상은 영국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에도 계급적인 불평등이 적지 않았으나 재능에 따라 출세하는 길이 열려 있었고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했다.
모루아는 영국인이 숭고한 정의의 혜택을 자각하고 고도의 준법정신을 갖게 된 것은 정복왕 윌리엄과 그 후계자들이 강력한 권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 시기 영국 내에선 다양한 형태의 지방회의가 공개 토론과 타협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예컨대 색슨 왕조에서 국왕은 자문회와 협력했고, 법률 제정에는 유력한 인물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애썼다. 영국의 통치자는 계속해서 나타나는 잠재적인 불평분자들을 적극적인 협력자로 돌려놓아 정권을 안정시켰다. 영국 국왕은 몇 명을 빼곤 거의 타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전 유럽에서 보편적이었던 절대왕정 체제가 영국에선 뿌리내리지 못했다.
영국에서 가장 무서운 법률은 불문율이다. 법전이 없는 일종의 관행법이다. 오랜 제도는 항상 새로운 추세를 시인하고 허용했다. 영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없었다. 사회가 격변하고 지배구조가 뒤바뀌는 혁명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의미다.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1688년의 명예혁명도 서명 교환의 단순 사건이었다.
영국 왕은 과세권과 강력한 군대 보유 제한을 수용했고, 의회의 동의하에 세금을 썼다. 다른 나라에서는 치명적인 계급투쟁 또는 당파 충돌도 영국에서는 그다지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타협이라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의 결정에 규율 있게 복종하는 습성이 먼 옛날 노르만 왕조의 배심제도로부터 형성되었고, 섬 사람들 특유의 밑바닥 단결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모루아는 분석했다. 모루아는 “영국의 이천년 역사는 인류의 뛰어난 성공의 기록”이라고 극찬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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