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론 한계 아나키즘 수용
민족해방운동 주장
이호룡 지음/돌베개/1만8000원 |
구한말 대표적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를 아나키스트의 측면에서 재조명한 책이다. 같은 시대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신채호만큼 조명을 받은 인물도 드물다. 비평가들 사이에선 ‘과대포장’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간의 신채호 연구는 대부분 역사가와 민족주의자의 측면에 집중된 반면 사회주의자 또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측면에선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저자는 신채호에게서 민족주의자의 이미지를 벗겨 내고 신채호의 진면목에 집중하려 했다. 저자의 노력은 일제강점기 국내 지식인들의 사상적 흐름을 살펴 전환기 지식인들의 고민과 흔적을 보다 깊이있게 조명하려는 것이다.
신채호를 민족주의자로 고정시키려는 시각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일제강점기가 본격화하는 1910년대까지 신채호는 한국의 대표적 민족주의자였다. 1900년대에 누구보다 먼저 민족주의를 제창했고, 1910년대에는 민족주의에 기초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1923)을 통해 민중직접혁명론을 제창하는 등 아나키즘의 선구자가 됐다. 저자는 “신채호는 당시 조선독립 민족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아나키즘을 수용했으며, 나아가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을 체계화했다”고 말한다.
뤼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민중의 직접 혁명이야말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후 신채호는 죽을 때까지 아나키즘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면 신채호는 언제부터 민족주의자로서 부각되기 시작했을까. 이는 1960, 70년대의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저자는 풀이한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일본 관동군 장교였던 자신의 이력을 가려줄 도구로 민족주의를 내걸었다. 그러한 가운데 (일본의) 강권에 반대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긴 저항적 지식인의 표상으로 신채호를 대표적 민족주의자로 부각시켰다.”
죄수복을 입은 단재 신채호.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에 붙잡혀 중국 뤼순 감옥에 투옥됐을 때의 모습이다. 단재는 조선민족해방의 일환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한 민족주의자였다. |
단재 신채호가 수감생활을 한 중국 뤼순 감옥 내부의 모습. 단재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6년 이곳에서 순국했다. |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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