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프로농구에서 6년째 휘슬을 불고 있는 선수 출신 심판 홍선희(37·사진)씨는 “심판으로서 감수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선수로서 못 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려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현재 남자 프로농구에는 여성 심판이 단 한 명도 없다. 여자 코트에는 홍씨를 포함해 4명이나 된다. “제가 중학교 때 여자 심판이 두 명 정도 있었는데, 여자도 심판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대학 졸업반 때 심판 교실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수한 뒤 흥미를 느껴 심판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천 명신여고를 거쳐 수원대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홍씨는 몸싸움이 많고 스피드한 농구에서 심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신속·정확한 판단력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꼽는다. 농구는 축구와 달리 어드밴티지 룰(반칙을 당한 쪽이 유리할 때 심판이 경기를 계속 진행시키는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농구 심판이 되려면 20m 거리의 셔틀런 86회, 28m 거리의 농구코트 엔드라인에서 속칭 ‘4계절 뛰기’(엔드라인에서→자유투 지역, 엔드라인에서→하프라인, 엔드라인에서→먼지역 자유투 지역, 엔드라인에서 →엔드라인까지) 등 비교적 까다로운 피지컬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농구 심판의 경우 한 경기를 맡다 보면 최소 9㎞ 이상을 뛰어야 하기에 체력은 필수다. 그래서 경기를 배정받지 않은 날에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위치한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에 마련된 체력 단련실을 찾아 두 시간씩 웨이트를 하고 있다. 리그가 내년 3월 말까지 5개월가량 진행되기 때문이다. “선수 때보다 더 뛰지만 좋아서 하는 것인 만큼 힘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집중하기 때문에 경기를 마친 뒤에는 긴장이 풀려 머리가 휑한 느낌을 받습니다.”
농구대잔치 덕분에 농구 인기가 많았던 시절인 인천 산곡북초등학교 5학년 때 신장이 1m66으로 비교적 컸던 덕분에 주변 권유로 농구공을 만지게 됐다는 그는 고교시절 제76회 구미 전국체육대회(1995년) 3위에 오른 게 고작일 정도로 이름을 크게 날리지는 못했다.
대한농구협회 심판을 거쳐 2008년부터 프로 심판으로 활약 중인 홍씨는 “올시즌 여자농구는 예년에 비해 많이 스피드해졌고, 흥미진진한 경기가 많아졌어요. 그래서 경기장마다 관중이 많이 늘어난 걸 실감합니다”라고 말한다. 관중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보는 눈이 많아져 더욱 ‘면도칼 판정’을 해야겠다는 책임감도 뒤따른다는 것이다. 홍씨는 “박진감 넘치고 스피드한 농구 경기는 TV 중계보다도 경기장을 찾으면 더욱 흥미로워요. 스트레스도 날릴 수 있고요”라며 보다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달라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홍씨는 여자프로농구 원년(1998년)부터 심판을 봐 왔던 이준호(42)씨와 결혼한 지 4년이 넘었지만 아직 아이가 없다. 심판직에 보다 집중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서다. 농구광인 이씨는 지난 시즌까지 심판으로 활약하다 지금은 고향인 대구에서 농구교실을 운영 중이다. 전형적인 주말부부다.
여자 프로농구에서 약 140경기를 소화했다는 홍씨는 지금까지 감히 오심을 낸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경기를 마친 뒤 집에 와서 자신이 맡았던 경기에서 행여 오심이 없었는지 분석을 마쳐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반드시 경기시작 두 시간 전에 체육관에 도착해 준비운동과 휴식을 갖는 게 일종의 룰이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아달라고 주문했다. “2010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WKBL이 저희 부부를 같은 경기에 배정하는 깜짝 이벤트를 했습니다. 저도 놀랐고, 남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부가 공식경기에 심판으로 나선 드문 광경이었죠. 막상 경기에 투입되니 집중하느라 또 다른 심판이 한 집에서 사는 남편이란 걸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홍씨는 남편을 자신의 후견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프로 코트를 밟은 이후 고참이었던 남편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아직도 경기 중 홍씨의 동선, 위치 선정 등 모든 걸 냉정하게 비판하고 조언해 주기 때문이다. 2002년 모교인 산곡북초등학교에서 4년 동안 지도자 생활을 한 적 있는 홍씨로부터 농구를 배워 선수로 활약 중인 제자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제자들이지만 행여 판정에 공정성을 잃을까봐 애써 가까워지려 하지 않는다.
홍씨는 영어공부에도 열심일 정도로 학구파로 이름 나 있다. 비시즌이던 지난 9월에는 영어를 배우러 필리핀에도 다녀왔다. 이번 시즌을 마친 뒤에도 어학연수를 갔다올 예정이다. 수원대를 졸업한 뒤 인하대 체육교육학과로 학사편입도 했다. 국제심판 자격증을 갖고 있는 그는 “선수들뿐 아니라 한국의 여자 심판들도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라며 활짝 웃었다.
박병헌 선임기자 bonanza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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