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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 유(류)씨 60여만명 최다… ‘삼한갑족’ 명성 이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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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4-22 21:59:46 수정 : 2014-04-22 21: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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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2> 유씨(柳, 劉, 兪, 庾氏) 같은 음을 갖는 유씨는 우리나라에 총 4개가 있다. ‘버들 유(류·柳)’, ‘성 유(劉·묘금도 유씨)’, ‘점점 유(兪)’, ‘곳집 유(庾)’가 그것이다. 그중 버들 유(류)씨가 60여만명으로 가장 많고, 그다음이 ‘성 유’를 쓰는 성씨가 24만명 정도이고, 그다음이 ‘점점 유’를 쓰는 성씨가 17만여명이다. 그외 ‘곳집 유’를 쓰는 1만2000여명까지 합하여 대략 103만명의 인구가 유(류)씨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의 연원은 제각각 다르다. 다만, 같은 한자를 쓰는 성씨는 같은 시조에서 파생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어, 성씨별 합본이 이뤄지고 있다.

‘버들 유(류)’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 대승(大丞) 벼슬을 한 류차달(柳車達, 문화류씨) 등이다. ‘버들 유(류)’씨는 문화류씨를 비롯해 고흥(高興), 배천(白川), 전주(全州), 진주(晉州) 등 56개 본관에 6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중 문화류씨가 28만여명이고 전주와 진주가 각각 6만여명, 고흥이 5만여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성 유’를 쓰는 성씨는 다른 말로 묘금도 유씨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묘(卯), 금(金), 도(刀)를 합한 글자이기 때문이다. 시조는 송나라에서 고려로 건너와 병부상서를 지낸 유전(劉?)인데, 한고조 유방(劉邦)의 41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강릉(江陵), 거창(居昌), 면천(沔川), 배천(白川) 등 47개 본이 전하고 있다. 인구는 총 24만여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 강릉을 본관으로 삼는 강릉유씨(江陵劉氏)가 17만8000명으로 가장 많다.

‘점점 유’를 쓰는 성씨는 기계(杞溪), 창원(昌原), 인동(仁同) 등 여럿이 있으나 모두 신라의 아찬(阿飡)이었던 유삼재(兪三宰)를 도시조로 하는 분파이다. 그중 기계유씨가 대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모두 17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중 기계유씨가 11만300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외에 ‘곳집 유’를 쓰는 성씨의 시조는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명장 유금필(庾黔弼)이다. 본관은 평산(平山)과 무송(茂松) 2본이다. 무송유씨는 유금필의 후손인 유필(庾弼)을 시조로 한다. 최근에는 같은 후손으로 여겨 무송유씨로 합본하였다. ‘곳집 유’씨는 고려시대에는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 번창했으나, 조선에 들어와 많이 쇠퇴했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만20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문화류씨는

문화류씨는 버들 유(류)를 사용하는 성씨로 우리나라 토착 성씨이다. 유씨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131본이 전하고 있으나 문화, 고흥, 배천, 전주, 진주 등 56개 본에 6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는 육창, 정주, 연안, 배천, 약목, 부평, 인동 등은 각기 원류로 흡수되어 9개 본관만 현존하고 있다.

류씨는 고려 통합삼한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 류차달을 시조로 하는 문화류씨,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으로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에 봉해진 류정(柳挺)을 시조로 하는 진주류씨, 신라 말 흥양(興陽)으로 낙향해 호장(戶長)이 된 류영(柳英)을 시조로 하는 고흥류씨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외 진주, 전주, 풍산, 서산, 선산은 모두 계보상 문화류씨의 분적종이어서 문화류씨의 분파로 다루어지고 있다. 참고로 진주류씨에는 류정을 시조로 하는 계통과 문화류씨에서 분적한 계통이 있다.

문화류씨는 문화 차씨(車氏)와 동족이성(同族異姓·같은 시조를 갖는 다른 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문화류씨 측은 이것이 위서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부인하고 있다. 문화류씨와 문화차씨의 동족이성설은 다음과 같다.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의 묘소 문화류씨 시조인 류차달의 묘소가 황해도 구월산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밝혔다. 사진은 구월산에 있는 류차달 묘소 전경.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의 선계는 중국 고대 하(夏)나라 제왕인 황제(黃帝)의 후예로, 하후우왕(夏后禹王)의 10대손 신갑(辛甲)이었다. 그는 기자가 동래할 때 동행하여 평양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산 이름 일토(一土)를 따서 성을 왕씨(王氏)로, 이름을 조명(祖明)으로 고치고 살았다. 그런데,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 대에 이르러, ‘왕씨가 나라를 일으킨다’는 민요가 떠돌자 의구심을 품은 준왕이 일토산 왕씨를 모조리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왕조명의 57대손 왕몽(王蒙)이 아들 왕림(王琳)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살면서 왕(王)자에다 두 획씩을 더해 전(田)으로 고치고, 두 번째는 신(申)으로, 세 번째는 성을 차(車)로 하고, 이름을 무일(無一)이라 고쳤다고 한다.

그후 차무일의 32대손인 차승색(車承穡)이 신라 애장왕(哀莊王)조에 좌상이었는데 왕의 숙부인 언승이 조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자, 애장왕의 원수를 갚으려다 실패하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할머니 성씨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류(柳)씨 성을 사용하고, 이름은 색(穡)으로 고쳤다. 이것이 우리나라 류씨의 시초이다.

류차달은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의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차(車) 1000량을 제작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리고 류차달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알고 류차달의 첫째아들 효전(孝全)에게 차씨를 계승하게 하고, 둘째아들인 효금(孝金)에게 류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로써 문화차씨, 문화류씨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대전 뿌리공원의 문화류씨 조형물
류차달의 9세손인 류경(柳璥)이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왕정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봉해지고, 유주(문화)를 식읍으로 하사받음에 따라 후손들이 이곳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문화류씨는 시조 류차달의 10세손과 12세손대에서 14파로 나뉘는데, 그중 많은 인물을 배출한 큰 파는 충경공파(忠景公派), 좌상공파(左相公派), 하정공파(夏亭公派), 검한성공파(檢漢城公派), 지후사공파(祗候使公派) 등이다.

문화류씨는 조선시대 610명의 과거급제자(대과 134명)를 배출했으며, 그중 공신 11명을 비롯하여, 상신 9명, 문형 1명, 호당 5명, 청백리 4명이 나왔다. 과거급제자 중에서는 문과에 141명, 무과 67명, 사마시 389명, 역과 7명, 의과 5명, 율과 1명이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문화류씨는 8만7186가구에 총 28만40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문화류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문화류씨의 시조는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을 보급하여 삼한벽상공신에 제수되고, 대승 벼슬을 한 류차달이다. 하지만, 류차달의 아들이 2명(효전, 효금)인가 독자(효금)인가에 대해선 주장이 엇갈린다. 문화류씨 측에서는 류차달의 아들은 독자로서 효금, 한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류차달의 7세손인 문간공 류공권(柳公權)은 명종 때 정당문학과 참지정사에 오르고, 그의 아들인 류언침(柳彦琛)과 류택(柳澤)으로 갈라졌다. 그후 문정공 류경, 정신공 류승(柳陞), 장경공 류돈(柳墩) 등 수대에 걸쳐 시호를 받아 번창하였으며, 삼한갑족으로의 명성을 누렸다.

파별로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충경공파의 파조는 류양(柳亮)이다. 그는 조선 태종 때 좌명공신으로 문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예문과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냈다. 그의 5대손인 충숙공 류권(柳權)은 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인종이 승하한 후에는 원상으로 서정(庶政)을 맡았으나, 명종 즉위 후 외척인 파평윤씨 진영에서 대윤과 소윤의 정권쟁탈 소용돌이에 휘말려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하는데, 이때 이조판서 류인숙(보주류씨), 대사간 류감(전주류씨), 이조참판 류희춘(선산류씨), 대사간 류경심(풍산류씨) 등도 파직당하고, 유배 받는 등 류씨 집안에 큰 화가 미쳤다.

‘문화유씨가정보’ 1880년 안동권씨 성화보가 발견되기 전까지 ‘문화유씨가정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인정되었다. 가정보 안에는 문화류씨 집안의 외손까지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는 충경공의 부윤공파인 문흥군 류사원(柳思瑗)이 청병을 위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와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좌상공파의 파조 류만수(柳蔓殊)는 조선 개국원종공신이 되었으나, 1차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에게 참살당했다. 류만수의 손자에서는 단종 때 청난공신인 류숙(柳淑, 판서), 류수(柳洙, 찬성), 류사(柳泗, 판서) 등 3명의 공신이 나왔으며, 현손인 문희공 류순(柳洵)은 세조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내다가 중종반정 이후 공신에 책록되고 문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류순의 아들인 류응룡(柳應龍)은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또 6대손인 문정공 류전(柳琠)은 명종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호당을 거쳐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후에 평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시녕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그외 안양공 류수(柳洙)는 성종 때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문성군에 봉해졌다. 류만수의 사촌이면서 정숙공파조인 류연현(柳延顯)은 태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하정공파의 파조인 문간공 류관(柳寬)은 태종 때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를 겸하였으며,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종에게서 궤장을 하사받고 우의정에 올랐으며, 고려사 편찬에 관여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학문과 시문에 능하였다. 그의 둘째아들 류계문(柳季聞)은 세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류계문의 손자 류담년(柳聃年)도 중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실학자이며 토지개혁과 경제혁신을 주장한 반계수록의 저자인 류형원은 류계문의 8대손이다. 그의 9대손인 충간공 류상운(柳尙運)은 숙종 때 문신정시에 장원하고, 대사간을 거쳐 영의정을 두 번, 판중추부사를 세 번 역임하였다. 하지만 장희빈 폐위에 얽힌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파직되었다. 그의 아들 만암 류봉휘(柳鳳輝)는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하였는데, 소론 측의 입장에서 영조의 책봉을 반대하여, 노론을 실각시켰으나, 사화를 일으킨 주모자로 노론의 공격을 받아 영의정에서 면직되고, 경흥에 유배되어 죽었다.

그외 기후사공파에서는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충경공 류성원(柳誠源), 실학자 류득공(柳得恭)이 있다. 이외에도 박연과 함께 아악의 기초를 세운 문숙공 류사눌(柳思訥), 임진왜란 때 공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류팽노(柳彭老), 정조 때 기정진 등과 함께 이름난 유학자인 류대원(柳大遠) 등이 있다.

류형원의 반계수록 조선 중기 대표적 실학자 류형원이 지은 반계수록. 사회개혁과 경제혁신을 주장했고, 특히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토지혁명을 부르짖었다.
◆문화류씨 근현대 인물

문화류씨에서는 삼한갑족의 명성답게 현대에 와서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1960∼70년대 야당의 거목이었던 류진산 전 신민당 총재를 비롯하여, 류인곤, 류광열, 류지원, 류창열, 류한열, 류인범, 류재희, 류경현, 류제연(이상 국회의원), 류기춘(문교부장관), 류병현(주미대사), 류양수(교통부장관), 류흥수(치안본부장, 현 경찰청장), 류태현(광주고법 부장판사), 류길선(춘천지검장)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농학계의 류달영씨를 비롯하여, 류홍열(서울대 문리대교수), 류형진(대한교육연합회장), 류태영(건국대교수), 류경채(서울대교수)씨 등이 있다.

재계에서는 류제국(경기은행장), 류호욱(미진산업㈜사장), 류용갑(페리관광호텔사장), 류용곤(타워호텔사장)씨 등이 있다(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됐음).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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