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서 근무하는 경력 8년차 소방관 A씨의 푸념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을 합쳐 모두 3000개가 넘는 안전분야 관련 매뉴얼이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활용 가치가 작다고 했다. 매뉴얼의 종류와 분량이 워낙 많은 데다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적지 않아 따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A씨는 “매뉴얼이 직원 문책용으로는 잘 쓰인다”며 “재난 현장 지휘관이나 소방관 본인 판단에 따라 일해야 하는 상황이 잦은데,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매뉴얼대로 하지 않아 그렇다’며 문책을 당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재난이 발생하면 단계별 대응 매뉴얼(안내서)이 도마에 오른다.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에서도 3000개가 넘는 재난대응 매뉴얼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A씨의 푸념처럼 매뉴얼이 종류만 많았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탓이다. 매뉴얼의 질은 높이고, 양은 줄이는 쪽으로 정비하는 동시에 제대로 된 매뉴얼 활용 교육·훈련을 하는 게 중요한 이유이다.
대형 재난 등에 대비한 ‘국가 위기관리매뉴얼’은 크게 3단계로 나눠져 있다. 가장 상위는 ‘위기관리 표준매뉴얼’과 ‘주요상황 (실무)매뉴얼’이다. 각각 풍수해와 지진, 산불, 감염병 등 25개 ‘자연·사회재난’(위기관리 표준매뉴얼)과 문화재·접경지역 사고 등 8개 재난(주요상황 매뉴얼) 유형에 대한 주관기관의 대응지침을 담았다. 이어 재난유형별로 주관기관을 지원하는 기관들의 주요 역할 등을 담은 ‘위기대응 실무매뉴얼’ 200여개가 있고, 마지막으로 각 지자체와 지방청 등의 상세한 현장지침을 소개한 ‘현장조치 행동매뉴얼’이 3200여개에 달한다. 과거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대증요법식으로 매뉴얼을 추가하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다. 언뜻 보면 어지간한 재난은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복잡하거나 실제 상황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으로 차 있다.
한 구조대원은 “구급파트 관련 매뉴얼은 500쪽짜리 책 한권 분량이라 담당자조차 모두 숙지하는 게 어렵다”며 “내용도 구체적인 사안별 대응보다 일반적인 사고 대응에 관한 게 많아 매뉴얼 의존도가 낮다”고 말했다. 아울러 “충격 상쇄용 기사 아이템을 발굴하라”는 식의 해양사고 위기관리 실무 매뉴얼에서 보듯, 본질에서 벗어난 재난 매뉴얼도 적지 않다.
윤민우 가천대 교수(경찰안보학)는 “배경지식이 없어도 매뉴얼을 보면 구체적 상황이 그려져서 사건·사고 발생 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하는데, 전문가가 아니면 무슨 맥락인지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라며 미국의 테러대응 관련 매뉴얼을 예로 들었다.
이 매뉴얼은 폭탄테러 발생 시 관계자별 역할과 의사 동원 방법, 피해자 병원 후송 등에 대한 사진자료와 풍부한 사례를 상세히 곁들여 누구나 쉽게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현행 재난 매뉴얼은 ‘사고 공화국’의 오명을 벗기는 데 한계가 많다는 얘기다.
정상만 공주대 교수(한국방재학회장)는 “재난현장에서 담당 공무원 등 관계자들이 매끄럽게 대처할 수 있도록 실질적 도움이 되는 매뉴얼로 재편해야 한다”며 “일반 국민을 위해서도 주요 재난별로 1, 2장 정도 간명한 매뉴얼을 만들고 방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알려서 재난 초기 침착한 대응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매뉴얼의 효용가치 결국 사람에 달려
그나마 잘 만들어진 매뉴얼들도 캐비닛이나 서랍 속에서 낮잠을 자기 일쑤다. 평소 재난 대비·대응 교육·훈련이 거의 없거나 가끔 하는 것도 형식적으로 그치면서 많은 매뉴얼이 사문화되고 있다.
서울 한 자치구 관계자는 “서류상 매뉴얼이야 잘 만들었을지 몰라도 막상 사고가 터지면 매뉴얼대로 할 수 있는 공무원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실행연습을 제대로 안 해 사고가 터지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중앙부처 과장도 “안전매뉴얼은 엄청 많은데, 그대로 훈련하지 않고 대부분 시늉만 한다”며 “감독기관에서 제재하지도 않으니 평상시에 매뉴얼을 살펴볼 일이 없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정 교수는 “모든 재난은 ‘골든타임’(생존 및 구조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생사와 피해 규모를 가른다”며 “상황별 매뉴얼에 따라 평소 교육과 훈련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재업무 담당자 교육도 허점투성이인 데다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지난해 광역(2곳)·기초(8곳) 지자체 10곳의 재해담당 공무원 20명이 ‘심폐소생술 교육’과 ‘생활안전 거버넌스 순회교육’ 등 재난관리 업무와 무관한 교육을 이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실태를 지도·점검해야 할 소방방재청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한국행정연구원 정지범 연구위원은 “기후변화 등에 따라 재난이 다양화·복잡화·대형화하면서 매뉴얼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며 “일본 원전사고 때처럼 재난 담당자가 전문성과 융통성을 갖추지 않으면 매뉴얼은 무용지물”이라고 지적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당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처음 겪는 유형의 대재난이었음에도 일본 공무원들이 기존 매뉴얼대로만 움직여 피해를 더욱 키웠다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지금처럼 안전·재난부서를 ‘기피부서’로 방치하고 담당자를 단기간 순환보직제로 운영하면 아무리 매뉴얼이 훌륭해도 소용없다”며 “적절한 책임과 권한 부여, 인사 혜택 등으로 담당자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강은·박영준 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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