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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대장서 집권당 대표로…김무성은 누구?

입력 : 2014-07-14 18:32:09 수정 : 2014-07-14 18: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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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새누리당 신임 대표(대표 최고위원)에 선출된 김무성 의원(63)은 정치권에서 일찍부터 '무대'로 불린다. '무성 대장'의 줄임말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김 대표는 어린시절부터 골목대장을 자처하고 싸움을 했다하면 늘 이겨 '무대'라고 불렸다고 한다.

김 대표 스스로는 무대라는 별명에 대해 "무슨 일이든 항상 솔선수범하고 조직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아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 적이 있다.

김 대표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부산에서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김 대표의 아버지 김용주 선생이 해방 후 전남방직과 신한제분을 운영하고 1970년 한국경영자총협회 초대 회장에 오르는 등 당대 부호였던 터라 김 대표는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알려진다.

김 대표는 부산 화랑초등학교에 이어 부산·경남 명문이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교인 경남중에 진학한다.

이어 서울로 이사한 김 대표는 중동고에 입학하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시위(데모)에 투신하게 된 것. 그가 서울 시내 13개 고교 연합 시위를 주도한 일도 있다.

김 대표는 중동고 졸업 후 대학 입학 전형에서 2차로 합격한 한양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당시의 젊은 청춘들이 그렇듯 김 대표의 대학시절도 반독재 시위로 점철된 시기였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독재 사회에 많이 비분강개 했고, 주로 개똥철학을 즐기면서 보낸 시기"라고 했다.

김 대표는 26세 나이에 동해제강 상무로서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이어 6년 만에 삼동산업 대표이사직에 올라 탄탄한 기업인의 길을 걸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출세가도를 달렸던 것은 아니다. 방위병 군 복무 후 스웨터 봉제 수출 사업을 벌이다 망해 둘째 형이 근무하는 철강회사 말단을 거쳤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경제가 얼어붙자 몸 담던 동해제강도 어려워져 신혼집 숟가락에까지 '빨간딱지'가 붙었다고 김 대표는 회고한다.

학창시절 반정부 시위에 몸 담았던 김 대표는 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보고 전두환 정권에 분노한 나머지 민주화 투쟁을 하겠다며 당시 YS를 찾아간 김 대표는 YS가 1984년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멤버로 참여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한다.

1987년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으나 민주계 지지를 받은 YS는 낙선했고, 김 대표는 YS가 당선한 92년 대선까지 절치부심하며 YS를 보좌했다.

김 대표는 YS 정부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청와대 민정·사정비서관, 내무부 차관 등을 두루 거친 뒤 1996년 제15대 총선(부산 남구을)을 통해 여의도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김 대표는 부산 남구을에서만 내리 3선을 했고 원내수석부총무, 재정경제위원장, 한나라당 사무총장, 최고위원 등을 거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2007년 박근혜 대선 후보 경선 캠프 조직총괄본부장으로서 인연을 맺었고, 특유의 카리스마와 호방함으로 의원들을 이끌며 한때 '친박좌장'으로까지 불렸다.

명실공히 유력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김 대표는 2008년 정치적 위기를 맞닥들인다.

김 대표는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당시 이방호 사무총장 등 친이(이명박)계가 주도한 공천에서 탈락했다.

'친박(박근혜)계 학살'로까지 불렸던 당시 공천 파동으로 김 대표는 한나라당에서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해 '친박 무소속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김 대표는 이명박 정부 집권 중반기인 2010년 당 원내대표 제의를 받아 그해 5월 원내대표로 추대됐다.

MB정부 하에서 그가 원내대표를 하는 것에 박 대통령 등 친박 그룹이 반대했으나 김 대표가 수락해 이때부터 그가 친박계와 멀어졌다는 게 정치권 중론이다.

김 대표는 그해 국회에서 표결된 세종시 수정안을 두고도 찬성표를 던져 세종시 원안을 고수한 박 대통령과 다른 길을 가며 더욱 멀어졌다.

김 대표는 2012년 친박계가 주도한 19대 총선 공천에서 또 다시 탈락하며 또 한 차례의 위기를 맞는다.

김 대표 스스로 "박근혜 대표에게 저항했다는 이유로 공천을 못받은 기구한 운명에 기가 막히는 심정"이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그의 공천탈락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김 대표는 탈당·무소속 출마를 하지 않고 "우파정권을 위해 백의종군하겠다"고 선언했다.

김 대표의 백의종군으로 당시 공천탈락 반발로 일던 '탈당러시'도 잠재워졌고, 새누리당은 19대 총선에서 과반 이상의 의석(152석)을 사수하며 승리했다.

김 대표는 총선 후 외국 여행을 다니는 등 '백수' 생활을 하다 2012년 대선에서 다시 당의 전면으로 컴백한다.

박근혜 대선 후보 캠프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당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김 대표는 당초 요청받은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아닌 총괄선대본부장으로 지위를 스스로 격하시키고 여의도 당사에 야전침대를 깔았다.

김 대표는 대선 기간 내내 야전침대에서 숙식하고 캠프 전체에 금주령을 내리는 등 특유의 카리스마로 캠프를 이끌며 대선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박 대통령이 당선하더라도 어떤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김 대표는 대선 후 사무실에 편지 한장을 남기고 떠난 일화가 유명하다.

김 대표는 대선 후 한달 만인 지난해 3월 박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만났다. 김 대표의 특사 파견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과 서로 마음의 빚을 모두 풀었다"는 말이 나왔다.

김 대표는 곧이어 지난해 4·24 재보궐 선거에서 부산 영도에 출마해 국회로 돌아왔다.

그가 복귀 후 본회의장 의원선서에서 던진 "언제든 소주 한잔 콜"이라는 파격적(?) 제안은 '무대'의 귀환을 알린 상징이다.

김 대표가 국회에 돌아오자 마자 그가 차기 당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김 대표는 지난해 9월 당내 의원만 98명을 포함해 총 116명이 가입한 '근현대 역사교실'을 만들어 좌편향 교과서 논란과 관련해 보수적인 목소리를 쏟아냈다.

김 대표의 역사교실을 두고 "당권전초기지", "세규합"이라는 말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 대표는 "순수한 공부모임"이라고 일축하며 역사교실을 마무리지은 데 이어 곧바로 '통일경제교실'을 발족했다.

김 대표는 아울러 국회 복귀 후 반년 동안 전국 도당, 각종 단체 강연 등을 부지런히 소화하며 당권 가도를 일찍부터 닦았다.

김 대표에 대한 당 안팎의 평가는 엇갈린다.

강한 추진력과 카리스마는 물론 친화력과 소탈함을 겸비해 늘 사람이 따르고, 야당에서도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박지원 전 원내대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야 두루 발이 넓다.

반면 그의 통큰 '대장 성향'이 집권여당 대표로서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김 대표는 이같은 우려를 불식하려는 듯 전당대회 선거운동 기간 동안 '돗자리 투어' 등으로 내내 몸을 낮추기도 했다.

가족관계는 부인 최양옥씨 사이에서 1남2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김 대표의 외조카다.

△1951년 부산 출생 △부산 화랑초·경남중·서울 중동고 △한양대 경영학과 △고려대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수료) △부경대 명예정치학 박사 △동해제강 전무 △삼동산업 대표 △민주화추진협의회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총무국장·기획조정실 부실장·국회행정실장 △민주자유당 의사국장·의원국장 △김영삼 대통령 후보 추대위 총괄국장 △제14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비서관·사정비서관 △내무부 차관 △제15대·16·17·18·19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원내수석부총무·한나라당 총재비서실장 △국회 재정경제위원장·한나라당 사무총장·최고위원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 △한나라당 원내대표·국회 운영위원장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제18대 대선 새누리당 중앙선대위원회 총괄본부장 △새누리당 대표 최고위원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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