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받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시인인 조지 맥도널드(1824∼1905)가 신뢰를 강조하며 한 말이다. 신뢰의 가치는 시대를 불문하고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지만 한국은 여전히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의 신뢰도 평가에서 낙제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세계일보는 올해 초부터 연재 중인 ‘신뢰사회 도약 프로젝트’ 연중 시리즈 1부에서 불신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본 데 이어 2부에서는 사회 곳곳에서 신뢰를 쌓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자선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해 돈이나 물건을 대가 없이 기부하거나 지속적으로 봉사를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이 신뢰받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평생 주변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중 일부를 되돌려주려 하는 것뿐입니다.”
한국타이어 춘천판매㈜ 근화점 대표인 임기수(74)씨는 타이어업계에서 한평생 일해온 자영업자다. 그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다. 바로 30년 넘는 세월을 이어온 기부활동이다.
임기수(74)씨가 강원 아너 소사이어티 9호 회원으로 가입한 기념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명예의 전당에서 아너 회원 현판을 걸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공 |
임씨는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그때부터 집을 떠나 타이어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며 “돈이 없어 학업과 꿈을 포기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타이어 판매점이 부도 위기를 넘긴 것도 그가 나눔을 실천하는 이유다. 임씨는 “가게와 집을 모두 잃고 이웃집을 전전하며 생활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를 믿고 금전적으로나 마음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며 “나눔이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씨는 1980년대 초부터 저소득층 학생 지원에 나섰다. 처음에는 알음알음 알게 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지역 기관을 통해 기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임씨가 내놓은 기부금은 7억여원으로 700여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그는 생을 다하는 날까지 나눔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임씨는 2010년 11월 ‘춘천로타리장학재단’을 통해 강원대 학생에게 2062년까지 연간 10계좌, 춘천고 학생에게 2060년까지 5계좌에 계좌당 100만원씩 매년 기부하기로 약속하는 ‘장학금 종신계약’을 했다. 계약이 끝나는 날까지 700여명의 학생이 혜택을 받게 된다.
강원도 사랑의 열매 나눔봉사단장이기도 한 임씨는 주변 상인들을 찾아다니며 매월 매출액의 일부를 기부금으로 내는 ‘착한 가게’ 확산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임씨는 “이웃에게 받은 도움을 어려운 분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성장해 또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는 문화가 확산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힘이 닿는 한 이웃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쌈짓돈 아낌없이 내놓는 자수성가 기부자들
임씨처럼 고액을 기부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은 현재 545명이다. 아너 그룹에 들어가려면 5년 이내에 1억원 이상을 납부하기로 하고 약정(최초 가입금액 300만원 이상, 매년 일정비율 20%로 기부)하거나, 일시 또는 누적으로 1억원 이상의 기부금을 내야 한다.
아너 회원의 직업군은 자영업자에서 기업인까지 다양하다. 자수성가형 리더들이 많다.
아너소사이어티 첫 가입자인 남한봉(73) 유닉스코리아 회장은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다. 1963년 군복무 중 사고를 당한 이후 다시는 두발로 서지 못하게 됐다. 기적처럼 살아난 남 회장은 구두쇠로 살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런 피땀어린 돈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류시문(66) 한국사회복지협회장도 몸이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그는 어렸을 때 동네 뒷산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쳐 장애자가 됐다. 하지만 아픔을 딛고 장애인 시설과 무의탁 노인 시설에 꾸준히 기부하고 있다.
한국인 아내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에 감동해 고액을 기부한 외국인도 있다. 전직 대학 교수인 독일인 하르트무트 코셰(72) 박사는 지난해 1억원을 기부했다. 코셰 박사는 1972년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이상숙씨와 결혼했는데, 이후 아동보육시설을 자주 찾아 봉사활동을 하는 아내를 지켜봤다. 코셰 박사는 “아내는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마음 아파했다”며 “부모 돌봄 없이 살고 있는 한국의 아동들을 돕는 데 (기부금을) 쓰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 재외동포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기부로 표현했다. 홍콩 영주권자인 김희상(56)씨는 2012년 1억원 기부를 약정하면서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하고 가입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우재혁(72) 경북타일 대표는 껌팔이, 신문배달 등 온갖 궂은 일을 해가며 성공한 뒤 기부를 시작했고, 자수성가한 오청(48) 신선설농탕 대표는 지역 기부와 설농탕 무료 제공을 하고 있다.
최근 세월호 참사 이후 거액의 기부금을 내놓는 인사들이 많아졌다. SPC그룹의 허영인(65) 회장은 지난달 25일 세월호 피해자 지원 및 국가안전 인프라 구축 등에 사용해 달라며 3억원을 성금으로 내놓았다. ‘세월호 성금’은 최근 1120억원을 돌파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공동모금회 관계자는 “나눔을 실천하는 모든 분들이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며 “아너 회원분들은 희망을 전하는 전도사”라고 말했다.
오영탁 기자 oy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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