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감시 속 시리아 74% 폐기… 北 보유 5000t 위협 여전
신경독(VX), 사린가스, 겨자가스 등 화학무기는 생물학무기와 함께 ‘가난한 자의 핵무기’라고 불린다. 핵무기보다 적은 비용으로 손쉽게 만들 수 있지만 파괴력이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처음 염소가스를 무기로 사용한 이후 화학무기가 인류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때 무려 130만명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국제사회는 1925년 제네바 의정서를 채택하면서 화학무기 사용 억제에 나섰다. 하지만 그 뒤에도 화학무기 피해는 끊이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이란과의 전쟁 당시 수백 차례 화학무기를 사용했으며, 아프가니스탄 분쟁과 보스니아 내전에서도 화학전이 벌어졌다는 보고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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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 화학가스가 사용돼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지난해 8월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에서 사린가스 공격을 감행, 어린이를 포함한 1300여명이 숨진 것이다. 당시 손 쓸 새도 없이 입에 거품을 문 채 숨진 이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까지 공개돼 공분을 샀다.
◆시리아 화학무기는 폐기 중
이에 미국 등 서방이 공습 가능성까지 경고하자 알아사드 대통령은 두 손을 들었다. 세계 3위 화학무기 보유국(약 1300t)인 시리아가 지난해 9월 드디어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 가입하고 올해 상반기까지 화학무기 전량을 폐기하기로 약속했다. 폐기작업은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주도 아래 카테고리1(치명적 화학물질), 카테고리2(기타 화학물질)로 나눠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이 기구는 지난해 10월 시리아 정부가 보유한 화학무기 현황을 확인한 뒤 미사일 탄두와 공중투하 폭탄, 화학물질 배합·주입 장비 등을 무력화했다.
이후 화학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은 국제사회의 지원 속에 단계적으로 진행 중이다. 먼저 봉인된 화학물질을 시리아 서부 라타키아 항으로 이송하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화물선이 옮겨 실어 이탈리아로 반출했다. 이를 티타늄 원자로 설비를 갖춘 미군 화물선 케이프레이호가 재차 옮겨 싣는다. 케이프레이호에서 분해된 화학물질은 지중해 공해상에서 최종 폐기된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감시카메라를 제공하고 러시아 군함은 화물선을 호위했다.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카테고리1의 국외 이송은 정정 불안과 기상 악화로 작업에 차질이 생기면서 지난해 12월31일이던 시한을 1주일 넘겨 완료됐다. 이후 카테고리2의 이송 작업도 지연돼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과 러시아, 중국, 이란 등 시리아 우방국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지난 4월에는 시리아 정부군이 반군 장악지역을 공격하면서 염소가스 실린더를 장착한 통폭탄을 사용했다는 국제인권단체의 주장이 나와 또 한번 긴장이 고조됐다.
“OPCW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규모 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과업”(영국 BBC방송)이라고 평가받은 시리아 화학무기 폐기작업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 OPCW는 지난 7일 시리아 전체 화학무기 비축량의 74.2%를 해체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분량도 두 달 안에 공해상에서 폐기가 완료될 전망이다.
◆화학무기 위협은 여전
1997년 CWC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출범한 OPCW는 그간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아흐메트 위쥠쥐 OPCW 사무총장은 노벨상 시상식에서 화학무기를 “볼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사전에 감지할 수도 없는 매우 사악한 유산”이라면서 반드시 폐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인류가 화학무기 공포에서 벗어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OPCW는 12일 현재 5545차례의 사찰활동으로 세계 화학무기 7만2425t 중 82.78%를 제거했다고 홈페이지를 통해 밝혔다. 이는 달리 말하면 17% 분량이 아직 폐기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뜻이다. 가장 큰 이유는 화학무기 보유 1, 2위국인 러시아와 미국의 화학 무기 폐기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탓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쿠르드족 학살에 화학무기를 사용한 이라크의 폐기작업은 착수조차 못했다.
CWC에 서명하지 않은 나라도 북한, 남수단, 앙골라, 이집트 4개국에 달한다. 국제위기감시기구에 따르면 북한은 최대 5000t의 화학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특히 보유량의 2배 이상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것으로 평가돼 위협을 더한다. 이스라엘, 미얀마처럼 CWC에 서명했으나 국내 비준을 받지 못한 국가의 화학무기 보유량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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