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경북 상주 ‘대산루’ # ‘한옥’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쓰는 여러 가지 용어 중에는, 의미는 전달되지만 어색한 용어들이 참 많다. 대부분 임시로 대충 부르던 것이 이름으로 굳어진 것들이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아마 ‘한옥’이라는 용어일 것이다.
‘한국인이 살았던 전통적인 집, 혹은 그런 형식을 가진 집’이라는 의미인 것은 잘 알겠지만, 사실 그 용어가 언제부터 쓰이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문제는 그 이름에는 어떤 정서적인 느낌도 없다는 것이다. 마치 다양한 물건을 편의상 앞 글자를 따서 분류하고 칸에 넣는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서양의 주택을 일컫는 ‘양옥’의 반대 개념으로 그냥 지어놓은 이름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건축’이라는 용어가 ‘세운다’(建)와 ‘쌓는다’(築)라는 의미의 합성으로 일본인이 만들어놓은 용어를 비판 없이 사용하다가 보편적인 용어가 된 것처럼, 건조하기 그지없는 용어이다.
상주 지역의 독특한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양진당. 약간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정면 9칸, 고상형으로 남방 다습 지역에 적합한 형식이다. |
한옥은 꾸준히 진화하며 각 시대의 기후와 지역의 특성, 그리고 삶의 형식을 담아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마치 시험 전날 벼락공부 하듯이 급격히 몰아닥쳐와 뚝딱 해치운 근대화와 현대화의 과정을 거치며, 한옥은 잠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구석으로 몰린 때가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하고 불편한 과거의 주거 형식으로 치부된 한옥 대신, 보다 ‘현대적’인 모습의 주거양식들이 점점 골목을 채워갔다. 그 기간 동안 우리 집들의 형식과 정신은 많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전통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이 생기며, 더불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에 친환경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다시 한옥이 부흥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지금 답습하고 있는 한옥의 형식이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인지, 또 지금의 여러 가지 삶의 여건과 형식에 부합하는지 하는 것이다.
툇마루의 끝에는 무척 생소하고 파격적인 돌계단이 들어서 있고, 그 계단을 오르면 크지는 않지만 무척 화려한 누마루가 둥실 떠 있다. |
# 아주 특별한 상주 지역의 한옥
요즘 간혹 2층 한옥이 지어졌다고 하는 소식을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다.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2층 한옥은 사실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경상북도 상주에 가면 몇 백 년 된 2층 한옥을 만날 수 있다. 알고 보면 2층 한옥은 예전부터 있었는데, 조선 중기 이후 온돌이 보편화되며 점점 사라졌고 상주에서는 2층 한옥의 자취가 남겨져 있는 것이라 한다.
그 대표적인 집이 우복 정경세 일문의 ‘대산루’이다. 우복 정경세는 조선 중기의 정치인이며 큰 학자이다. 그는 동시대의 학자이며 학문적으로 반대 진영에 있었지만 친한 벗이었던 사계 김장생과 더불어 당대 예학의 종장(宗匠)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평생 익히고 다듬은 학문의 거대한 물줄기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퇴계 이황이 보이고, 서애 류성룡이 보인다. 정경세는 류성룡이 키워낸 제자이며, 류성룡은 퇴계가 키워낸 훌륭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는 영남 성리학의 맥을 잇는 적자인 셈이다. 류성룡은 학문적으로도 뛰어났지만 정치인으로서의 활약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국난이 많았던 선조대의 정치가로서 바빴던 그가 거의 유일하게 키워낸 제자가 정경세이다. 그가 상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청년 정경세를 발탁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정경세는 정치인이자 학자로 평생 존경을 받으며 살았고, 그가 죽었을 때 임금이 슬퍼하며 이틀 동안 조회를 중지했다고 한다. 나는 학문적으로 정경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주도해서 건축했다는 병산서원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 이해하게 된다. 마치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을 통해 퇴계를 이해하고, 산천재와 뇌룡정을 통해 남명 조식을 이해하고, 남간정사를 통해 우암 송시열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2층 건물의 하부에는 부엌과 창고 등 하인들의 공간을 만들어 이용자 간의 동선이 교차되는 것을 최소화하는 등 이 집에는 무척 다양한 공간적 디테일이 숨겨져 있다. |
지난 가을 상주로 답사를 갔다가 그를 다시 만났다. 정경세가 3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71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었던 곳과 그 일대를 ‘우산동천’이라고 한다. 그의 생전에는 작고 소박한 집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영조가 정경세의 생전의 공을 치하하며 남북으로 10리, 동서로 5리의 넓은 영역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의 사후의 일이며 이후 종가도 크게 중창되고 아주 멋진 강학과 독서의 공간인 ‘대산루’를 신축하게 된다.
우복종가는 병산서원처럼 경사가 급한 곳에 앉힌 아주 단순한 집인데, 정경세가 지어서 살았던 집을 후세에 크게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아직도 후손이 기거하고 있고, 근처에 초가로 지어진 두 칸 너비의 작은 초가집인 계정, 그리고 대산루가 있다. 많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많은 종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척 검소해 보이는 집이다. 다만 그 배치와 진입의 위계는 병산서원에서처럼 여전히 가파르고 강마르다. 일자 형태로 만들어진 사랑채에 앉거나 사랑채 뒤에 앉아있는 안채의 대청에 앉거나 앞으로 쏟아져 내릴 듯 가파른 마당을 보게 된다. 물론 덕분에 앞으로 펼쳐진 전망이 시원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흘러내릴 듯 경사를 그대로 집안으로 끌어들인 예는 처음 본다. 정경세의 독특한 건축관을, 혹은 그의 학문관을 보는 것 같다.
조선시대 우복 정경세 가문에 세워진 경북 상주의 대산루. 각각 1층과 2층으로 된 집이 T자 형태로 직교하며 각 채의 다양한 경관을 얻게 된다. 대산루와 같이 시대와 호응하고 당시의 생활을 수렴하며 당시의 기술로 지어지는 집을 진정한 한옥이라 할 수 있다. |
우산동천에 들어서며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계정이라는 건물은 종가와는 대조적인 건물이다. 정경세가 어린 시절 공부하던 곳이며 그가 고향으로 물러나 공부하며 막걸리를 먹던 곳이라고 한다. 그 옆의 대산루는 2층으로 된 한옥이다. 그것도 온돌이 2층에 적용된 희귀한 사례이다.
우리나라에 온돌이 보편화된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한다. 이전에는 쪽구들이라는 형식, 즉 일부만 구들을 들인 벽난로 같은 기능을 하는 구들이 있었다. 일부 부유층에서 온돌을 사용하기는 했는데, 17세기 이후 온돌이 보편화되며 우리의 주거형식과 삶의 형식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우선은 사람들의 생활형식이 입식에서 바닥에 앉는 좌식으로 변화했다. 그러면서 가구의 형식과 창문의 형식 등 많은 건축적인 조건도 변하게 되었는데, 한옥이 수평적인 건축으로 바뀌게 된 것도 그런 생활의 변화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고려시대까지는 보편적이었던 2층으로 된 건물이 거의 사라졌다고 추측된다. 한옥은 좌식이며 단층이라는 전제는 사실 그렇게 오래된 방식이 아니다. 궁궐의 일부나 혹은 사찰의 일부에서 볼 수 있는 다층 한옥이 아주 특수한 건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희귀하게도 상주 지역에는 그런 한옥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문신 검간 조정이 처가 문중의 99간 가옥을 옮겨지은 양진당이라는 집이 그렇고, 대산루라는 집이 그렇다.
대산루는 산을 만나는 집, 산을 대하는 집, 산을 보는 집, 산과 조응하는 집이다. 정면으로 난 툇마루의 끝에는 무척 생소하고 파격적인 돌계단이 들어서 있고, 그 계단을 오르면 크지는 않지만 무척 화려한 누마루가 둥실 떠 있다. 그리고 마루의 북쪽으로 방이 있는데, 그 방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아래층 부엌에 한층 높이의 구들을 설치한 것인데 이것은 아주 희귀한 예이다. 그리고 그 뒤로 서재와 장서고가 있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 귓가로 무언가가 휙 하고 지나갔는데, 혹 제비가 있나 하며 그 방에 들어가 보니 그것은 박쥐였다.
집은 T자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들어서면 1층으로 된 두 칸 마루와 한 칸 온돌방으로 구성된 단층건물과, 1층에는 부엌과 구들이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고 누마루와 온돌방과 서고로 구성된 2층이 있는 건물이 T자형으로 만나는 구성이다. 두 채의 집이 직교하며 각 채는 다양한 경관을 얻게 된다. 많은 이들이 들어오는, 그러므로 접근이 용이해야 하는 강학공간을 입구에 단층으로 놓고, 극히 사적인 공간은 안쪽 2층으로 올리고 공간을 교묘히 중첩했다. 누마루와 방, 서재, 서고 등은 외부로는 잘 보이지 않고 아늑하지만, 사방이 훤히 보이는 좋은 경관을 지킬 수 있게 만들어졌다. 2층 건물의 하부에는 부엌과 창고 등 하인들의 공간을 만들어 이용자 간의 동선이 교차되는 것을 최소화하는 등 이 집에는 무척 다양한 공간적 디테일이 숨겨져 있다.
대산루는 내가 본 많은 집 중에서도 무척 멋있고 뛰어난 맵시를 가진 집이었다. 그리고 우리 전통에 대한 고정적인 시각을 깨는 집이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진정 한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와 호응하고 당시의 생활을 수렴하며 당시의 기술로 지어지는 집. 한옥은 한없이 유연하며, 뛰어난 세상을 보는 우리만의 가치를 담고 꾸준히 진화하면서, 동시에 지금도 꾸준히 한국 사람의 정서를 담아내는 집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집,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이어주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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