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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에 할퀸 상처같은 외벽…인류의 죄악에 메시지 던지다

입력 : 2015-03-10 20:44:18 수정 : 2015-03-11 1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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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13> 유대인 박물관
납작한 철로 제작한 가면 1만개가 깔린 길로 만들어진 카디슈만의 작품 ‘공백의 기억’을 걸어가면 밟을 때마다 마치 비명과도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난다.
# 악의 평범성, 생각하지 않는 말이 낳은 범죄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 아이히만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은 나치의 친위대 중령이었고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일컫는 ‘최종해결’의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을 체포하고 수용소로 수송하는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그 결과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대부분 사망했다.

그 비극의 책임을 묻는다면 나치라는 정신착란의 조직에게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그 일을 수행한 사람은 아이히만이었다. 그는 나치가 패망하자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공장의 기계공으로 은신하다가 1960년 이스라엘의 모사드 요원들에게 납치되었다. 그리고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7개월에 걸쳐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그 재판은 전 세계에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유대인 출신 독일 철학자이며 아이히만과는 1906년생 동갑이지만 같은 시대를 정반대의 상황 아래서 살아왔던 한나 아렌트는 그 재판을 생생히 지켜봤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스승으로 철학을 공부했으나 나치의 핍박을 피해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서 정착하여 연구 및 저작 활동 중이었다.

그녀는 미국의 잡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천연덕스럽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음을 강조하는 아이히만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며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정리한다. 자신이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행하지 않게 될 때, 그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죄는 생각하지 않는 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하지 않는 죄다. 남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죄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은 죄이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은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는 ‘최종해결’과 같은 상투어로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타인과의 연관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끊어놓았고, 아이히만과 같은 이들의 현실감각과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자신의 행동이나 언어에 비판적 사고를 멈추면 그것 자체가 죄악인 것이다. 그런 상황을 한나 아렌트는 말의 무능력, 사고의 무능력,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감의 무능력으로 정의했다.

타인의 고통이나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던지는 많은 말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내뱉는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적개심이나 상투적인 공격성을 아무런 감각 없이 내뱉어대는 것, 그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도 낯익은 상황이다.

온 국민을 고통스럽게 만든 슬픈 사건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든 글이나 전 대통령, 특정 지역, 여성 등을 겨냥한 근거 없는 혐오가 난무하는 사이트가 주목의 대상이 되는, 현재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상황과 ‘악의 평범성’은 너무나도 흡사하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단련된 언어에 대한 무감각한 관성이 현실에서의 테러로 이어진 사건은 그것이 단지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치기 어린 장난을 넘어서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기울어진 49개의 콘크리트 기둥으로 구성된 추방의 정원.
# 유대인, 역사를 이끈 놀라운 이름


홀로코스트(Holocaust)로 사망한 유대인은 당시 유럽 유대인 인구의 3분의 2였던 600여만명이라고 한다. 왜 나치는 그토록 유대인 배척에 집착했던 걸까. 당시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가 1차 대전의 패배로 침체된 독일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을 이용했다고도 하고, 그들이 축적한 자본을 빼앗아 전비로 사용하고자 했다는 지적도 있다. 어쨌든 세계 경제위기나 테러의 배경에 유대인이 있다는 음모론이나 예수를 부정한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인 시선이 역사적으로 오래도록 존재했다고는 해도, 무모한 대학살로 이어진 것은 인류가 부끄러워해야 할 참담한 역사적 현실임은 분명하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덜한 우리 같은 경우도 어릴 적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등을 통해 그들이 돈만 밝히는 인색하고 파렴치한 사람들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그 소설을 쓰던 당시의 영국에는 정작 유대인이 없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또한 전해들은 유대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하지 않고’ 관성적으로 샤일록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해낸 것이다.

유대인이 고리대금업 등과 같은 상업에 종사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게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것이 기독교에서 금기시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유일신을 믿는다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단결력과 폐쇄성 때문에 타 종교로부터 거주지를 제한당하고(게토·중세 이후의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된 거주지역) 뿔뿔이 흩어져 살아갔던(디아스포라·팔레스타인 밖에 살면서 유대교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 유대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가졌던 절박함이 유대인을 소수이지만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만들었다.

어렸을 때 인상적으로 읽었던 또 다른 책으로 유태인의 율법서 ‘탈무드’가 있다. 유대인의 지혜와 처세술이 담긴 탈무드는 히브리어로 ‘연구’와 ‘배움’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구약 내용이 이후 기독교의 성경이나 이슬람교의 코란으로 정리되었다면, 탈무드는 랍비에 의하여 기록되는 율법, 민간 전승, 전통 등을 망라한 유대인의 경전인 셈이다.

현대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는 세 사람, 철학자 마르크스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모두 유대인이다.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J P 모건, 스타벅스와 인텔의 창립자도 유대인이며,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과 트로츠키, 위대한 문학가 카프카도 그렇다. 스페인 빌바오 뮤지엄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의 건축가 루이스 칸도 유대인이다.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최고가 된 그들의 유전자가 놀랍기만 하다.

유대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하여 2001년 개관한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뚜렷한 의도나 패턴이 읽히지 않는 사선으로 그어진 상처처럼 느껴지는 창들은 추상회화처럼 구체적인 설명은 없으나 어떤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인류의 죄악에 대한 강력한 건축적 메시지

2차대전 이후 유럽에는 많은 도시에 유대인 박물관이 세워진다. 그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가장 인상적인 박물관은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오래된 도시 베를린에 생경하게 끼워져 있다. 마치 낡은 고가구 위에 놓인 첨단 전자제품처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있다.

이 박물관의 전신이었던 유대인 박물관은 1933년에 설립됐으나 나치에 의해 1938년 폐쇄됐다. 1989년 국제 현상공모가 개최되어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의 설계안이 당선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건물은 1999년 완성되었고 처음에는 별다른 전시품 없이 개장되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에 정식으로 개관했다.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덴마크 유대인 박물관.
다니엘 리베스킨트 역시 유대인 건축가이다. 그는 1946년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1957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음악을 전공하려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나 미국에서 미술 공부에 전념하다 쿠퍼유니언으로 가서 결국 건축을 하게 된다. 그의 건축은 한때 해체주의라고 하는 무척 급진적인 경향의 건축을 추구했다.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가들의 드로잉을 연상시키는 그의 드로잉은 마치 그 당시의 자하 하디드처럼 현실에서 구현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되고 그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건축은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를 감당하기 적당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베를린 외에도 덴마크 등 여러 곳에 유대인 박물관을 설계했다. 

뚜렷한 의도나 패턴이 읽히지 않는 사선으로 그어진 상처처럼 느껴지는 창들은 추상회화처럼 구체적인 설명은 없으나 어떤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아연과 티타늄으로 둘러싸인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의 표면에는 사선으로 그어진 선들이 마치 손톱에 할퀴인 상처처럼 도드라지게 보인다. 그리고 건물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창문이 없고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입구도 창문이 없는 터라 내부의 공간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건축이 아니라 어떤 상징이며 하나의 조형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의 눈높이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건물도 마치 긴 막대기를 마구 늘어놓은 듯 어지럽게 펼쳐져있다. 마치 철갑을 두른 듯한 외관에는 표정도 없고 몸짓도 없다. 다만 뚜렷한 의도가 읽히지 않고 특별한 패턴도 읽히지 않는 사선으로 그어진 상처만이 있을 뿐이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마치 추상회화처럼 구체적인 설명은 없으나 어떤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당하게 서있는 건물의 옆에 어색하게 서있는 바로크 시대의 건물, 즉 과거 프로이센의 법원 건물을 통해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과거를 기억하며 지금의 몸으로 들어오라는 강력한 요구와 같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혼란스럽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서남북의 방향성이 여기에는 없다. 그리고 빛도 없다. 육체의 혼란과 정신의 혼란을 겪으며 들어가면 24m 높이의 높고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거나 납작한 철로 만들어진 가면이 깔린 길을 걸어가게 만든다. 그 철들은 사람이 밟으면 마치 비명과도 같은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 소음을 겪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난감하게 만드는 이 박물관은 생각없이 남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배려하지 않았던, 멀지 않았던 과거의 인류가 저질렀던 죄악에 대한 강력한 건축적인 기록인 것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곳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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