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적 과잉반응은 日논리 홍보하는 셈
큰 틀의 국제정세 살펴 냉정한 대응전략 짜야 워싱턴 시내에 벚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지난달 잦은 폭설 탓에 예년보다 조금 늦다. 조만간 워싱턴 곳곳에서 주미 일본대사관이 준비한 벚꽃 관련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질 것이다. 교묘하게 일정을 맞춘 듯 오는 29일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미국을 국빈방문한다. 일본 총리로서 첫 미 의회 합동연설이 예정돼 있다. 잔인하다. 워싱턴의 4월이 바야흐로 일본을 위한 달이 되는 셈이다.
잔인하다 못해 자학적이다. 우리 외교가 일본 외교에 밀리고 있다는 탄식이 쏟아지고 있다. 마치 우리 축구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에 대패라도 한 듯하다. 한·일 경기가 그런 식으로 끝나면 늘 그렇듯 ‘외교 선수들’에 대한 질타가 이어진다. 일본에 합동연설의 트로피를 내준 데 대한 책임 추궁이다. ‘전술 부재다’, ‘용인술의 문제다’ 등등. 외교 당국자들은 어느 해보다 잔인한 4월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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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 워싱턴 특파원 |
최근 벌어진 상황을 곰곰이 되짚어 보자. 지난 2월 말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 발언을 놓고 국내에서 큰 논란이 벌어졌다. “정치지도자가 과거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건 어렵지 않다”는 대목 때문이다. 과거사 논란 책임이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에도 있다는 취지로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 공직자 한 명의 발언에 우리 사회가 과민반응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피습사건이 지난달 초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미안해 어찌할 줄 몰랐다. 집단 죄의식과 자책감의 과잉 반응이었다. 일부 정치인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 논란을 공론화했다. 사드 도입 당위성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값싼 박수를 얻고자 한 게 아니라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미국 정부 요청이 없었다는데도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일이었다.
아베 총리의 의회 합동연설이 결정되면서 한국 외교의 무능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도 중요하지만 일본은 이슬람국가’(IS) 격퇴작전, 에볼라 퇴치 등에 거액을 쾌척하는 든든한 동맹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70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하는 일본 총리에게 선물을 주는 걸 막기란 명분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일본에 밀렸다는 지적은 부적절하다.
물론 우리에게 외교전략이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지난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놓고 지나치게 좌고우면했다.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 논란 때처럼 실기했다는 지적이 많다. 고민만 하느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에 선수를 빼앗기면서 우리 몸값만 낮추는 꼴이었다. 한 인사는 “늦은 바에 차라리 확실하게 미국 편에 서는 게 차선책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만큼 우리 외교 지형이 복잡다기해진 탓이긴 하다. 대미 동맹을 중심으로 변수를 관리하는 1차방정식에 비해 중국까지 상수로 주어진 2차방정식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말하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은 해법이 될 수 없다. 속된 말로 안보만 기대고, 돈만 빼가겠다는데 어느 나라가 좋아할까. 안미경중은 비공개 전략회의에서나 나올 만하지 공개적으로 거론할 용어가 아니다.
역사 문제로 한·일 관계의 경색이 지속되는 한 미국 중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베 총리의 의회 연설 하나로 외교전이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 ‘한국피로증’을 거론하면서 일본 측 논리를 확대 재생산해 줄 필요가 없다. 동시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더욱 많아질 게 분명하다. 큰 틀의 국제정세를 살펴 대응전략을 철저히 세워야 기회를 놓치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박희준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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