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앉으실 때 혹시 주변에 임산부가 있는지 한 번 더 둘러봐 주시는 배려를 부탁드립니다.”(올 7월, 서울지하철 2·5호선에 새로운 디자인의 임산부 배려석을 설치할 당시 서울시 관계자의 말)
모두 허공의 메아리로 흩어졌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운영한 지 2년이 되어가지만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임산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해 지하철 이용을 꺼리는 처지다.
매일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 A(30)씨는 언제부턴가 객차 중앙 교통약자 배려석의 핑크카펫을 신경 쓰게 됐다. 자리가 비어 있어도 앉고 싶은 생각이 없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엉덩이를 붙였겠지만, 최근 있었던 일 이후로는 다른 자리를 찾거나, 서서 가게 된다.
A씨는 약 한 달 전, 지하철에 앉아서 퇴근 중이었다. 하루종일 일에 시달리느라 피곤했던 A씨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시 후 눈을 뗀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한 임산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A씨는 자신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끝자리를 선호했던 그는 빈자리가 눈에 보이자 아무 생각 없이 앉았는데, 해당 좌석이 배려석이라는 것을 기억한 것이다.
A씨는 얼른 일어나 임산부에게 “앉으세요”라며 양보했다. 임산부는 미안한 듯 손을 내저었지만, 계속된 A씨의 권유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임산부는 자리를 양보해준 A씨의 서류가방을 대신 들어줬으며, 몇 정거장 후 내릴 때는 다시 “고맙습니다”라고 미소 지었다.
A씨는 뿌듯하면서도 어쩐지 미안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일부러 잠든 척한 것처럼 비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그 이후로 A씨는 웬만하면 임산부 배려석이 아닌 다른 좌석에 앉게 됐다.
국내의 한 포털사이트 임산부 커뮤니티. '지하철 임산부'로 검색하면 관련 내용이 담긴 수많은 게시물을 볼 수 있다. |
지난 7월, 서울지하철 2호선과 5호선에 핑크색 임산부 배려석이 등장했을 때 “저렇게까지 했는데도 양보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반응이 있었다.
현실은 정말로 그랬다. 국내 한 포털사이트의 임산부 커뮤니티에는 배려석에 앉아 자신을 보고도 끝까지 양보해주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앞의 아저씨는 저를 보더니 바로 자는 척하시네요.”
“임신하고 깨달았는데, 노약자석과 임산부석은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해요. 임산부석 앞에 서서 뱃지를 걸어도 다들 스마트폰 보시기 바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그냥 자리 나는 곳에 가서 앉아요.”
물론 모든 승객들이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같은 커뮤니티의 한 임산부 네티즌은 “아주머니께서 자리를 내주셔서 고맙게 느꼈다”고 글을 남겼으며, 다른 네티즌도 “어머니뻘 되시는 분께서 비켜주셔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글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눈에 띌 뿐이다.
서울지하철 2·5호선에 설치된 '임산부 배려석'. 총 2884개 규모다. 핑크색 디자인으로 공개 당시 "저렇게까지 했는데도 양보하지 않겠느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
지난 9일,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임산부의 날 10주년 맞이 ‘임산부 배려 인식과 실천수준 만족도 조사’에서도 임산부 10명 중 4명이 좌석양보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8월31일부터 지난달 13일까지 임산부 2767명과 일반인 5764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조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배려 행위는 ‘좌석양보(64.9%)’로 집계됐다. ‘짐 들어주기’와 ‘줄서기 양보’는 각각 9.2%, 4.1%로 조사됐다.
일반인들이 답한 임산부를 배려하지 못한 이유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답변은 ‘임산부인지 몰라서(49.2%)’였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초기 임산부들을 인식하지 못해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방법을 몰라서’와 ‘힘들고 피곤해서’를 이유로 꼽은 응답자 비율은 각각 14.1%, 8.5%였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사진=서울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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